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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승리 Oct 31. 2020

"캠핑은 예정에 없었는데요?" - 나 홀로 자전거 여행

뉴질랜드 남섬 자전거 여행기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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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실 무지했기 때문에 발전했던 게 아닐까?


오늘의 라이딩도 무지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높고 끝없는 산을 넘어버렸으니 말이다.



천혜의 자연 풍경을 지닌 뉴질랜드라가 어딘들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첫 번째 목적지는 Nelson에서 바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곳이 아니라 굳이 Takaka라는 곳이다.


자전거 여행의 첫날이라는 두근거림과 알 수 없는 모험심은 나를 Takaka로 이끌었다.


그래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계획했던 루트


Nelson과 Takaka는 대략 99Km 떨어진 거리다. 구글맵을 참조하면 약 800m에 달하는 고지대를 지나야 만 도착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마 지금 다시 가라고 하면 다른 볼거리들도 많은데 굳이 들어갔다 다시 나와야 하는 Takaka를 선택했을까 싶다. 그만큼,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듯 돌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역시나 처음은 서툴고 어색하다. 짐을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전거에 실어 놓으니 균형이 안 맞고 불안했다. 


짐을 그냥 올린건지 실은건지 알 수 없다. 자전거의 비명이 들린다. "살려줘"


자전거 스탠드가 "살려달라"라고 비명을 지르는 걸 애써 무시했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슴이 아팠지만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다시 짐을 풀어헤칠 자신이 없었다. 애써 스탠드의 비명을 무시하고 출발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공기도 상쾌하고 몸도 가벼운 느낌이다. 처음 Nelson에 도착해서 지나왔던 공항 가는 길인 Richmond 방향으로 향했다. 아직까진 색다른 풍경이 보이진 않는다.



페달을 밟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첫 주행에서 100Km에 육박하는 거리가 만만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오늘 내엔 가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이다.



중간중간 이색적인 풍경들도 펼쳐진다. 호주에서 겪었던 복잡한 느낌도 없고 도로에 차들도 별로 없다. 라이딩하기에 최적인 상황이다.



얼마나 페달을 밟았을까? 시간이 꽤 지나니 슬슬 배가 고프고 체력이 떨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주변에 쉴만한 그늘이 더러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쉴만한 곳이 별로 없다. 길이 쭉 뻗어있는 건 좋은데 쉴 곳이 없다니.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웬만한 거리에는 있을법한 상점 하나 찾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마침 가로수가 멋지게 펼쳐진 '어느 입구'를 발견했다. 


'공원 같은 곳인가?'


맘대로 들어가면 안 되니 입구 쪽 그늘에서만이라도 쉬자라는 생각에 입구 바로 옆 나무에 터를 잡았다.


'참 멋진 곳이네.


아름다운 풍경에 자전거를 모델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드넓은 곳이 사유지라니


사진 촬영 후 다시 쉬려는 찰나에 저 먼 곳에서 빨간색 SUV 하나가 달려왔다. 차 안에는 어려 보이는 아가씨들 넷이 타고 있었는데 운전대를 잡은 여성이 "여긴 사유지니까 나가."라고 얘길 했다. 이때, 바로 사유지에 잘 못 들어왔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늘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는지 "잠깐 쉬고 가면 안 되냐?"라고 물었다. 돌아오는 답변은 당연하게도 "안 돼"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짐을 챙겨 나왔다.




다시 달리고 달려 Motueka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마을이다. 다행히 카운트다운 슈퍼마켓이 있어서 부족하게 챙겼던 먹거리를 샀다. 이것저것 많이 쟁여서 다니면 좋겠지만 그게 다 자전거에 실을 짐이 되니 최대한 간소하면서도 바로 먹을 수 있는 것 위주로 챙겨야 했다.


점심도 안 먹고 달렸더니 허기진다. 다행히 마을에는 쉴만한 공간이 많았다. 근처 공원에 앉아 짐을 풀고 빵과 바나나를 꺼내 먹으며 지도를 펼쳤다.



여행 내내 유용하게 썼던 지도


Motueka에서 Takaka까지 대략 50Km만 더 가면 된다. 근데 중간에 매우 높은 고도를 자랑하는 산이 있다. 위 지도에 자랑스럽게 Takaka Hill라는 표시도 있다. 이때까진 지도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높고 긴 거리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림을 보고는 '그냥 좀만 고생하면 되겠는데?'라고 생각했다.(멍청이)

그래도 나름 너무 높으면 자전거를 끌어서(소위 '끌바')라도 가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있었다.



Motueka까지 무난히 왔으니 문제 있겠는가 생각하며 천천히 Takaka Hill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얼마쯤 페달을 밟았을까 슬슬 언덕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 이제 업힐이 시작됐나?' 


아니? 아니었다. 이건 메인 업힐 축에도 못 끼는 그냥 소소한 언덕이었다. Abel Tasman 국립공원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등장하면서부터 메인 업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래도 조금 지나면 다운힐이 나올 거야'


나름 희망을 가져보며 페달을 밟았는데 이도 아니었다. 이미 자전거에서 내린지는 오래고 열심히 끌바를 해서 기어 올라가듯이 라이딩이 아닌 등산을 하는데도 업힐은 끝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더 힘들었던 건 길이 어찌나 꼬불꼬불한지 한 커브 돌고 나면 다시 커브 길이 수차례 나왔다. 그리고 바깥길은 곧장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길이다. 

당시 극악스러웠던 커브길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과 커브. 사진 찍을 기운도 없었다.


무려 3시간을 걸었다. 자전거를 탄 게 아니고 걸어서 3시간이다. 그래도 업힐은 쉽사리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벌써 시간이 꽤 흘러 슬슬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나는 '야맹증'이 있다. 야간에는 자전거를 타려고 해도 탈 수 없다. 어두우면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최대한 아침 일찍 출발해서 그날의 라이딩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슬슬 어두워지는 기미가 보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Takaka까지 가는 건 언감생심이고 오늘 하루 캠핑이라도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근데 양옆은 산과 절벽이고 정면은 도로인데 어디에 몸을 누인단 말인가. 슬슬 마음이 달아오를 즈음 전망대 같은 곳이 보였다. 더 이상 앞뒤 가릴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들어가서 장소를 확인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벤치도 있었고 외부에 쉽게 노출되는 장소도 아니었다.


부랴부랴 더 어두워지기 전에 텐트를 치고 텐트에 짐을 풀었다. 혼자 처음으로 외딴곳에 있으니 겁도 났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망대라 그런지 중간중간 구경을 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특별히 나에게 별 말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첫 캠핑이다


잠깐 지쳐서 누워있다가 허기가 져서 마트에서 샀던 라면을 눈물겹게 부숴 먹고 자리에 누웠다. 씻지도 못하고 얼굴은 종일 햇볕에 타서 엉망이다. 얄궂게도 내 몸은 어찌나 생리적으로 잘 움직이고 있는지 갑자기 변이 마렵기 시작했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로망이여! (울부짖음)


무너진 로망 속에 나는 숲을 찾아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랑 똑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는지 몇몇 휴지들이 보인다.


오전까지만 해도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감사함과 감격으로 페달질을 했는데 저녁이 되니 너덜너덜해진 상태가 됐다.


이게 그 '이상과 현실의 차이'일까?



주행거리:  76.46Km

이동위치: Nelson - Hawkes Lookout Par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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