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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승리 Aug 13. 2022

두려움 속에서 - 나 홀로 자전거 여행


늦은 시간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텐트에서 자는 것도 이제 익숙해질 때가 됐으련만 아직까지도 적응을 못한 걸까. 새벽 2시가 넘도록 잠을 못 이뤘다. 잔 건지 만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잠이 깬다. 추운 날씨에 나가기  싫어 비비적대다가 겨우 밖으로 나가 소시지를 굽고 수프를 끓였다.


수프와 소시지를 먹고 양치를 하고 짐을 정리했다. 플라이 스프레이 덕에 텐트 안엔 샌드플라이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게 됐지만 텐트를 정리하고 나면 이 흡혈귀들은 금방 내 종아리를 쪽쪽 빨아먹는다. 다시 또 미친놈 마냥 탭댄스를 추며 짐을 쌓다가 자전거를 넘어 뜨리고 다시 짐을 바로 잡아 올린다. 전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물을 담아 샌드플라이의 배웅을 받으며 홀리데이 파크를 나섰다.



오늘은 큰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부지런히 밟자. 중간에 야영은 필수이니 산을 못 넘어도 어쩔 수 없으려니 마음은 조금 편히 하고 출발했다.


Haast pass가 59킬로 떨어져 있어요. 


안내 표지를 보고 '아 저곳이 경치 좋은 곳인가' 하고 지나쳤다. 가이드북을 또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경사로가 20Km쯤 가면 나올 줄 알았는데 가도 가도 언덕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자잘한 경사로만이 날 귀찮게 했다. 잠시 쉴까 하면 샌드플라이들이 나를 다그치고, 다시 멈췄다 가길 반복하며 언제 즈음 가이드북에 보였던 오르막이 나오나 기다렸다.

 

뭔가 무시무시한 비주얼의 소떼들


맑은 강물 위를 가르는 보트


중간에 Roaring Billy라는 곳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청아하게 맑은 물이 흐르며 산 너머로 비춰 들어오는 빛줄기에 물이 반짝반짝거렸다. 아름다운 모습에 사진을 찍던 중 왼편에서 보트 한대가 시원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관광객들이 타고 있었는데 몹시 부럽다.


1차로 다리(OLB)를 만나면 빠르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 밖으로 나와 자전거를 끌고 이동한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오늘 넘어야 할 산인가? 아름답기도 하구나. 어느덧 출발한 지 50Km 정도 됐다. 마침 pleasant flat이라는 doc 캠핑장이 있어 잠깐 화장실 들리고 물이나 받아가자는 생각에 갔는데 물을 받으려니 남아있는 음료수가 아까워 받아 갈 수가 없다.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왔는데 샌드플라이가 어느새 다가와 인사를 한다. 부리나케 다시 자전거를 챙겨서 출발.



이제는 언덕이 나오겠지 하며 달리지만 오늘의 메인 언덕은 안 보인다. 언제 나와!!



조금 더 가자 다시 높다란 산이 보인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겸손히 끌바로 올라가다가 산의 경관이 너무 멋져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근데 사진을 찍으며 문득 마음의 소리가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했다' 라며 혼자 낄낄 거렸는데 정말 앞으로 뭔 일이 있을지 몰랐다. 


사진을 찍고 길이 조금 평평해져 자전거에 털썩 앉았는데 바닥에 닿는 느낌이 이상하다. 밑을 봤더니 어느새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어디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난감하다. 어차피 오르막 길이야 자전거를 끌고 올라간다지만 자꾸 바퀴 휠에 씹히는 타이어가 걱정된다.


어디 자전거를 잠시 손볼 장소가 없나 찾아가는데 웬 사내들이 방송 장비 같은 걸 들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 게 보인다. 여기 뭐 찍을 게 있나 하고 다리를 지나가는데 계곡에서 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 모습을 찍으려고 지나가던 관광객들도 위험한 다리로 들어와 사진을 찍고 있다. 나도 잠시 내 상황을 망각하고 사진을 찍고 다시 이동했다. 다리를 지나 조금 올라가자 주차장이 보인다. 여기서 수리를 할까 하고 잠시 앉았는데 샌드플라이가 꽤 있다. (망할)



안 되겠다 싶어 조금 더 올라갔는데 샌드플라이가 다소 줄어들었다. 냉큼 자전거 짐을 풀고 뒷바퀴를 뺐다. 여행 시작 후 펑크 상황은 처음이다. 한국에서 뵀던 자전거 사장님이 여행 중 펑크 나면 바로 때우려고 하지 말고 대체 타이어로 바꾸란 얘기가 생각난다. 당장 펑크 때울 상황도 아니니 냉큼 그 말에 따라 여분으로 주셨던 타이어를 끼워 넣었다. 넣고 바람을 넣으니 금세 타이어가 말짱해진다. 근데 타이어 교체하면서 타이어 내부에 가시가 있나 확인 안 한 게 마음에 걸린다. 



다시 자전거에 짐을 쌓고 끌바로 언덕을 올랐다. 올라가며 이제 쉴 곳을 찾을까 더 갈까 고민. 시간은 아직 좀 있었으나 가는 길에 캠핑할 곳을 못 찾으면 그것도 난감하다. 중간중간 bay가 있어서 저기서 쉴까 하다가 지나가길 몇 번. 마실 물이 없어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를 받아 다시 올라가던 중 공사 중이었던 bay를 발견했다. 


꽤 넓은 장소라 여기서 텐트를 칠까 말까 고민하던 중 맞은편 큰 바위 돌에 하트를 발견했다. 누군가 일부러 바위에 낀 이끼를 하트 모양으로 없앤 모양이다. 뭐가 좋았는진 모르겠으나 펑크로 인해 늦어진 시간과 물도 폭포수로 받아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즐겁게 하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힘겨운 시간 속에서 문득 하트를 발견하고 그걸 즐기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려고 내가 이런 힘든 일들을 하고 있지 않나.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걸 즐기고 인내하는 내 모습에 놀란다.


문득 <왕좌의 게임>에서 브랜이 아버지에게 '이런 무서운 상황에서도 용감해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때 네드는 '그 순간이 오직 용감해질 수 있는 때다.'라고 대답한다. 


"Can a man still be brave if he's afraid?" 
"That is the only time a man can be brave."


지난 시간 동안 난 무얼 두려워했던 걸까. 외로움 속에서 누군가 같이 있으면 더 즐겁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하며 정작 본인은 남들이 부러워할 상황에서 즐거워하지 못했다. 누군가 있으면 조금은 더 즐겁겠지. 하지만 그 누군가도 언젠간 또 다른 여행을 위해 떠날 것이다. 나 스스로 즐기지 못하면 영영 즐겁지 못할 것이다. 더럽고 힘든 상황이지만 즐겁게 맞아들이자. 혼자 재밌게 놀다 보면 동료도 생기고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홀로 노는 것에도 즐거움을 찾을 길이 있지 않겠는가.


기분이 한결 나아진 상태로 계속 달렸다. 오후 6시까지 달려보고 그 이후에 쉴 곳을 찾을 생각이다. 조금 더 이동하니 꽤 쉬기 좋은 곳을 발견했다. 널찍하게 도로 옆으로 공간이 나 있고 개울이 흐르고 있다. 여기면 쉬기 괜찮겠다는 생각에 짐을 풀고 텐트를 쳤다. 물론 여지없이 샌드플라이는 동행하고 있다.


짐 정리를 한다고 들락날락하다가 텐트 입구 방충망을 닫는 지퍼가 부러졌다. 밖에 샌드 플라이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위급상황이다. 뚫려버린 입구로 샌드플라이가 침공할 듯싶다(맙소사). 잠시 멘붕에 빠져 '어쩌지?' 부러진 지퍼를 억지로 붙여 움직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다. 어찌할 방도를 못 찾다가 챙겨 온 실과 바늘이 생각났다. 어쨌든 이 뻥 뚫린 곳을 닫아야 잘 수 있을 테니 아예 봉합해 버리자. 


바늘에 실을 끼는데 마음이 급하니 잘 안 껴진다. 당장이라도 샌드플라이들이 습격할 것 같은데 마음이 초조하다. 연신 스프레이를 입구 쪽에 뿌리며 바느질을 했다. 처음엔 대충 입구부터 닫자는 생각에 마구 바느질을 하는데 실을 너무 길게 뽑아 엉켜서 제멋대로 묶여버렸다. 이로 실을 끊고 다시 바느질을 해서 겨우 한번 봉했다. 한결 여유로워진 상태에서 2차 바느질에 들어갔다. 망 밖으론 샌드플라이가 들어가고 싶다고 난리다(소름). 간신히 봉합하고 나니 나갈 수 있는 입구가 좁아졌다. 그래도 오늘 밤은 견딜 수 있으리라.


지금 쓰고 있는 이 텐트는 호주에 처음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백패커에서 만난 어떤 독일 청년에게 10불 주고 산거다. 원래는 25불인가 하는 걸 싸게 샀다. 근데 원체 싸구려라 그런지 보온도 안되고 구리다. 그래도 덕분에 텐트에서 자면서 아낀 돈이 상당한데 부디 뉴질랜드 여행 끝날 때까지 잘 버텨주길 바란다.

정신없이 텐트 수리를 끝내고 나니 배가 고프다. 샌드플라이에 쫓기고 펑크 수리를 하느라 점심을 걸렀 더랬다. 텐트 안에서 버너를 켜고 미고랭을 삶아 먹었다. 미고랭 덕분에 굶지 않고 여행한다. 


다 먹고 양치하고 망가진 신발을 수선하고 헬멧 위에 고프로용 지지대를 손 봤다. 내일은 고프로로 촬영 시도를 해봐야겠다.



주행거리: 6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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