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자전거로 여행하는 날이다. 생각보다 와나카에서 너무 오래 쉬었다. 부지런히 일어날 생각에 어제도 일찍 눕긴 했으나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7시 반이 조금 넘었을까. 일어나 바로 어제 먹다 남은 닭을 데워 먹었다. 식사 후 대충 씻고 바로 짐을 쌌다. 최대한 빨리 출발하고픈 마음에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시간은 어느덧 9시를 넘겼다. 좀 더 일찍 준비하려 했건만.
날이 흐리다. 대게 이런 경우 오후에는 해가 쨍쨍해졌으므로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캠핑장을 나와 바로 마트로 향했다. 많은 차들이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다. 다들 와나카 쇼를 보러 온 걸까?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고 다시 출발. 구글 지도를 보고 일단 마을을 벗어나려 했는데 구글 지도가 crown saddle을 지나는 길로 안내했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망설였다. Crown saddle을 지나면 70Km만 달려도 퀸스타운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높이가 무려 1200에 가까운 산이 버티고 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경사가 조금씩 가파르게 올라가서 체감상으로는 크게 힘들지 않을 것 같다. 한번 도전해봐?
그런데 길이 꽤 좁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번 타카카 힐을 오를 때 고생한 걸 생각해보니 위험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6번 하이웨이를 타고 가려는데 이 길은 120Km에 달한다. 도착하는 건 바라지 않고 근처까지 가서 캠핑을 하자.
와나카를 벗어나 오랜만에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 변속기도 손질했고 타이어도 빵빵하게 만들어 달리는 맛이 난다. 근데 바람을 너무 빵빵하게 넣은 탓인지 노면이 구린 탓인지 덜컹덜컹하며 가는데 손목에 충격이 그대로 전달됐다.
많은 차들이 와나카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내가 가는 방향으론 간간히 몇 대 지나간다. 뭘까. 오늘 와나카 쇼에서 뭔가 대단한 거라도 하나? 의문을 품은 채 달리고 달린다. 중간중간 언덕이 나왔지만 오랜만에 달리는 패기로 끌바 없이 가볍게 넘어주었다. 흐린 날씨 덕에 사진 찍는 맛은 안 났지만 달리긴 편했다. 땀도 덜나고 갈증도 덜하고 눈도 덜 피로하고 피부도 덜 탔다. 햇볕이 쨍쨍하면 선글라스 안 낀 눈이 금방 피로 해진다. 렌즈를 끼자니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지 몰라 끼기 애매해서 낄 수가 없다.
와나카를 벗어나 cromwell에서 점심을 먹자는 생각으로 달렸다. 12시에 도착하길 바랐는데 초반에 좀 헤매는 탓에 늦어졌다. 결국 오후 1시 즈음 cromwell 근처인 low burn이라는 곳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커피케이크를 먹었다. 세일해서 샀는데 설탕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다. 강물을 보며 잠시 놀다가 출발.
Cromwell을 지나며 과일 파는 곳들이 보였다. 천도복숭아를 Kg당 3불에 판다길래 가서 봤더니 벌레가 조금 먹은 것들만 따로 모아 판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므로 몇 개 샀다.
주변을 보는데 어디선가 총소리가 났다. 하지만 묘하게 탕! 소리가 아니라 대포는 아니고 무슨 포를 쏘는 듯한 펑! 하는 소리다. 안 그래도 어제 성훈이가 호주 브리즈번에서 총 들고 설친 놈이 있다는 이야길 해서 긴장됐다. 뭐지?
펑!
소리는 얼마간의 간격으로 계속 난다. 진원지를 찾으려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긴 파이프에서 소리가 나고 있다. 알고 보니 주변에 포도밭이나 과일 밭이 많은데 그곳에서 새를 쫓으려고 일부러 내는 소리인가 보다. 새로 인한 작물 피해가 심각한지 넓은 과수원에 그물망을 전부 쳐 놓은 게 보인다.
Cromwell을 벗어나자 다시 한적한 도로가 이어진다. 역시 오후가 되니 햇살이 너무 따갑다. 선크림을 치덕치덕 바른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니 어느새 길 옆에 시원한 계곡이 보인다. 한국의 계곡물과 같은 투명한 색이 아니라 정말 푸른 청색빛의 계곡물이다. 감탄하면서 가다가 길 옆에 사과나무가 있길래 하나 먹어봤는데 맛이 영 아니다.
시원한 계곡 물이 옆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내가 가는 길엔 그늘 한 점 없다. 계곡 길을 지나 gibson(?)에 도달했을 때, 시간이 꽤나 지나 있었다. 슬슬 오늘 숙박할 곳을 찾아봐야 한다.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오늘은 캠핑을 감행하기로 한다.
퀸스타운으로 계속 이동하면서 쉴만한 곳을 찾아보려는데 여기저기 넓은 사유지들이 포진해 있어서 마땅한 곳이 안 보인다. 게다가 와이너리가 매우 많아 캠핑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얼마나 더 가야 캠핑할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그늘 한 점 안 보이는 곳을 계속 달리자니 눈이 몹시 피로해졌다.
자전거 속도계는 어느덧 내가 80Km를 달렸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옆에 다리가 보이고 관광차들이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구경하고 갈까 말까 망설이는데 아직 까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자전거를 돌려 관광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낯익은 언어가 들린다. 맙소사 한국인들이다. 하나투어라고 적힌 버스가 보이고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이리 반가울 수가.
자전거를 세워놓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여기가 kawaru번지점프 장소였다. 세계 최초의(?) 번지 점프대로 유명한 곳이라는데 어쩌다 오게 됐구나. 구경이나 할 겸 다리 쪽으로 가서 봤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푸른 계곡 물이 흐르는 곳에 번지 점프대가 설치되어 있다. 가격을 물어보니 기본 180불 사진 or 동영상 40불 이런 식이다. 일단 뒤로하고 다시 숙박할 만한 곳을 찾아 이동했다.
오늘 머물 곳을 찾기 시작한 지 꽤 됐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다. 꽤 많은 와이너리와 사유지들이 포진해 있다. 이미 100Km를 기록한 속도계 표시를 보며 난감해졌다. 이러다 오늘 퀸스타운까지 밟을 기세네.
점점 왼쪽 무릎이 아파온다. '어쩌지. 그냥 퀸스타운까지 들어갈까.' 하는 사이 옆에 crown saddle을 넘어오는 길이 보였다. 차들이 멈춰서 퀸스타운으로 방향을 돌리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저 차들은 빨리 왔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가는데 내 옆에 갑자기 자전거 여행자가 붙어왔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wanaka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도 거기서 왔다며 1Km만 1Km만 이러고 왔단다. 딱 보니 crown saddle을 넘은 것 같다. '헐. 대단한 사람일세.' 픽턴에서부터 시작해 왔다는데 꽤 짧은 시간에 많은 거리를 왔다. 6개월간 휴가를 얻어 여행을 하게 됐다는데 부러운 일이다. 어떤 회사길래 6개월이나 휴가를 주다니. 영국인이라는 이 청년은 이름이 Nigel이다. 같이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문득 자전거가 출렁출렁 하는 느낌이 난다. 뒷바퀴를 보니 또 펑크가 났다. Nigel을 먼저 보내고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며 주변에 캠핑할 곳이 있는지 보며 걸었다. 마땅한 곳이 없다. Lake hayes에 있지 않을까 봤는데 캠핑 금지 장소다. 모터 캠프는 앞으로 8Km 정도 떨어져 있다.
'모르겠다. 그냥 걸어가자.'
펑크를 때우려면 짐 내리고 펑크 난 곳을 찾아야 되니 그냥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청난 햇볕을 맞으며 걷는데 눈을 뜨기 힘들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 반인 지금까지 끊임없이 햇볕을 받으며 라이딩을 했다. 하필 와나카에서 퀸스타운이 남쪽 방향이라 하루 종일 정면으로 빛을 보고 온 샘이다. 이젠 눈뜨기도 힘들어 감다 뜨다 하고 가는데 갑자기 앞에 어떤 아저씨가 자전거 타이어를 들고 나타났다.
나에게 타이어 있냐고 물어보길래 있는데 그것도 펑크 났다고 하니. 그냥 걸어가는 거보다 펑크 수리하고 가는 게 더 나은데 왜 안 하냐고 묻는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그냥 걷는 다고 하니 고치고 가는 게 빠르다며 자길 따라 오란다.
따라가니 앞에 차가 세워져 있었다. 뒤에는 자전거가 매달려 있었는데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인 듯했다. 차 안엔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족들의 시간까지 뺐다니.
그 아저씨는 자기 연장을 가져오더니 펑크 난 타이어를 고치자고 했다. 내가 자전거 짐을 다 빼내려고 하니 그냥 옆으로 누위란다. (응?) 난 왜 자전거를 옆으로 눕히고 고칠 생각을 안 했지?
자전거를 눕히고 바퀴를 빼냈다. 아저씨는 빼낸 바퀴에서 능숙하게 타이어를 빼냈다. 그리고 자기 타이어를 끼워 넣고 낑낑 거리며 바퀴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와 교대해서 나도 바람을 넣었다. 순식간에 타이어에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갔다. 다시 타이어를 끼려는데 브레이크가 걸렸다. 내가 툴을 써서 브레이크를 풀려고 하니 그 아저씨가 쉽게 브레이크를 빼고 바퀴를 제대로 설치해줬다. 15분 남짓의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끝마쳤다. 너무 고마워서 고맙다고 하니 키위는 항상 남을 돕는다며 윙크를 하고 여행 잘하라는 말을 하고 가려고 하길래 이름을 물어보니 존이라고 답해주었다.
그동안 여행길에 고맙게도 몇몇 사람들이 날 도와줬는데 변변히 제대로 답례도 못했다. 아쉬워 같이 사진을 찍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멍청하게 나는 왜 브레이클 고치는 게 훨씬 시간 절약이 된다는 생각을 안 한 걸까. 여하튼 존의 도움으로 힘이 났다. 힘을 내서 바로 퀸스타운까지 달리려 했지만 시간이 많이 늦었다. 주변에 쉴 곳이 없나 하다가 frankton의 한 모터 캠프에 자릴 잡았다. 힘든 하루다. 오늘은 무려 116Km를 달렸다. 맙소사.
주행거리: 116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