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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Apr 13. 2020

당신의 ‘우리 집’은 어디인가요

 어렸을 때 내 꿈은 ‘좋은 집’에 사는 거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모님을 좋은 집에 살게 해 드리는 거였다. 초등학생 무렵에 살던 집은 화장실이 없어서 셋방살이하는 여러 집과 함께 공용화장실을 써야했다. 한 화장실을 여러 이웃들이 같이 쓰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집에서 꼭 휴지를 챙겨서 가야 했는데, 혹시라도 잊어먹고 가는 날엔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고장 난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힌 이웃 아줌마에게 알몸을 고스란히 내보이기도 했다. 한 번은 다른 사람이 변기에 용변을 묻힌 일이 있었는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분명히 내가 그랬을 거라며, 엄마한테 “경호는 X구멍이 삐뚤어진 거 아니냐”라고 말해서 너무나 억울했었다. 그때 얼마나 억울했던지 아직까지도 그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때는 지하 집에 살았다. 반지하는 그래도 빛이 조금이라도 들어오지만 지하이다 보니 햇빛이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아 대낮에도 불을 안 켜면 집안이 완전히 깜깜했다. 낮잠이라도 자다 일어나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언제나 눅눅하고 퀴퀴했던 그 집의 냄새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매일같이 아침부터 밤까지 고되게 일하시는 아빠, 얼마 안 되는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가며 더 이상 아낄 수 없을 만큼 아껴 쓰는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사시는데도 집안 형편은 눈에 띄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 있는 자식 교육에는 절대 돈을 아끼지 않으며 항상 아등바등 살아가는 부모님의 모습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었다.


 당시 강남의 새 아파트에 사는 막내 이모의 집은 너무나 멋지고 근사했는데,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돈 많이 벌어 꼭 내 힘으로 부모님을 막내 이모네처럼 좋은 집에 살게 해 드리겠다는 것이 내 삶의 목표였고, 내 노력의 원동력이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다 지치고 힘들어 나태해질 때면 그때마다 다시 다짐했다. 반드시 잘 돼서 부모님께 남부럽지 않은 좋은 집을 선물해 드리리라.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보니, 월급을 모아 집을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년 기다린다 해도 내 월급이 오르는 속도보다 아파트값 오르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 어려울 것 같았다. 부모님은 계속 나이들어 가시는데 마냥 돈 모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부모님은 노원구 중계동에서 가까스로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살고 계셨다. 나는 그 집을 팔고 은행에서 내 이름으로 몇 년치 연봉만큼을 대출받아 그때 막 그린벨트를 풀어 주거단지를 조성하고 있던 경기도 고양시 삼송지구의 34평짜리 새 아파트를 엄마 이름으로 사드렸다.


 새 아파트는 정말 좋았다. 요즘 지은 집은 구조가 워낙 잘 나와 베란다를 모두 확장하고 나니 40평이 넘어 보였다. 정남향의 집이라 온 집안에 따사로운 햇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지상의 넓은 정원에서는 봄이면 벚꽃, 진달래, 개나리 등 수많은 꽃들이 피었고, 아파트를 둘러싼 공원에는 푸른 들판이 펼쳐졌다. 80 평생 고되게만 살아온 부모님이 드디어 남부럽지 않은 멋진 집에 살게 되신 거였다. 내 소원, 부모님을 좋은 집에 살게 해드리고 싶다는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이곳이 천국이라고 하셨다. 여행도 갈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이렇게 좋은 집을 놔두고 뭐 하러 돈 들이며 딴 곳에 가냐고 말씀하셨다. 강아지를 데리고 매일 산책을 다니실 때면 한없이 행복해하셨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흘렀다.

 며칠 전 아버지가 뇌출혈로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입원하기 며칠 전부터 아버지는 이상증세를 보이셨다. 집에서 자꾸만 우리 집에 가자고 말씀하셨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아버지는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고 우기셨다. 그럼 누구 집이냐고 했더니 여기는 막내 이모 집이란다. 뇌출혈로 인해 기억에 혼란이 온 아버지에게 이렇게 크고 좋은 집은 본인 집이 아니라, 막내 이모 집이었다. 여기가 천국이라며 그렇게 좋아하시던 우리 집에서 아버지는 하루 종일 불안해하시며 빨리 우리 집에 가자고 조르셨다.

 대체 우리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우리 집은 양평동이란다. 아무리 떠올려도 양평동에 대한 기억이 없어 엄마한테 물었더니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양평동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날 마흔에 낳았으니, 그때 무렵이면 아버지가 딱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다. 지금처럼 늙고 아프지 않았을, 한창 에너지가 넘치고 꿈 많았을 아버지의 젊은 시절, 아들이 태어나 한없이 행복했을 그때, 아버지의 힘으로 마련했을 그 집이 비록 좁고 보잘것없는 집이었을지언정 아버지에겐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우리 집이었나 보다.

 병원에 입원해계신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빨리 집에 가자고 하신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우리 집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아버지의 몸도 마음도 어서 빨리 우리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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