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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Apr 20. 2020

친구가 없어서 고민인 이들에게

 친구는 꼭 필요한 것일까? 친구를 어디까지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보통 친구라 말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친구’는 ‘서로 의지할 수 있고,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닐까 싶다.


 요즘 SNS를 보면 친구가 적다는 것, 혹은 친구가 별로 없다는 것이 고민인 사람이 많다. 드라마나 영화 속 아름다운 우정 스토리를 보면서 ‘나는 왜 저런 친구가 없을까’ 생각하며 외로움을 느끼고, 자신의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런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자신을 패배자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친구가 별로 없다는 게 고민인 사람이 많다는 건 어쩌면 지금 세상에서  그런 친구가 적거나, 더 나아가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은 아닐까?


 ‘친구’ 혹은 ‘우정’에 대한 격언은 유난히 많다.


“친구는 나의 기쁨을 배로 하고, 슬픔을 반으로 한다” - 키케로

“나보다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우정, 이러한 우정은 어떠한 어려움도 뚫고 나아간다”  

 - 무어

“친구란 두 신체로 겹쳐진 하나의 영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격언들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깊은 우정을 가진 친구가 없는 사람은 정말 인생 헛 산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해주는 친구가 몇 명은 있어야 할 거 같고,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할 거 같고, 나의 기쁨과 슬픔은 온전히 친구들과 나눠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 꼭 그렇게 깊고 진한 관계만이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우정에 대한 그런 신화 같은 믿음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를 생각해보면 지금과는 인간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사람이 평생 살아가는 사회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당연히 평생 교류할 수 있는 사람도 한정돼 있었다. 인간관계의 형성 방식도 오직 직접 대면하는 방식밖에 없었다. 개인의 지식과 능력치의 한계 역시 분명해, 우리의 ‘두레’처럼 서로 힘을 보태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였다. 따라서 나와 깊은 관계의 사람을 얼마나 확보하느냐 하는 건 곧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내 모든 걸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느냐 하는 건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어디 그런가. 한 사람이 접할 수 있는 사회의 범위는 거의 무한대로 확됐다. 인터넷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성별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우정을 나눌 수 있다. 굳이 직접 얼굴을 보고 만나지 않더라도 내 속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고,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과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선을 넘는 깊은 관심은 요즘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받는 시대에서는 오히려 부담이 되기도 한다. 나의 슬픔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도 좋지만, 나의 아픈 부분이나 내밀한 얘기를 굳이 주변 사람들한테 털어놓지 않고 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 경우도 많다. 오히려 깊지는 않더라도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고 넓은 관계가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도 있다.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즐거워질 수 있고, SNS를 통해 알게 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깊지는 않더라도 서로 적당한 거리를 지켜주고, 그 안에서 과하지 않은 감정을 교류하는 관계가 더 긍정적인 친구관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구에 대한 생각은 예전 시대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오랜 격언 속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그런 친구를 잘 만들지 못하는 자신을 탓한다. 그러다 보면 어린 시절, 또는 학창 시절 마냥 좋았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지나간 우정에 집착하게 된다. 그때 그토록 친했던 친구가 왜 지금은 이렇게 멀어진 것인지, 영원토록 변치 않을 것 같던 우정이 왜 이렇게 빛이 바래버렸는지 생각하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아무리 뜨거웠던 우정도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밤이 새도록 떠들어도 할 얘기가 남았던 찰떡궁합 같던 친구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나면 예전처럼 할 얘기가 넘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며 각자 처해진 상황이 달라지고, 주변 환경이 달라지면서 자연히 관심사가 변하고 고민의 양태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 ‘내 여자 친구의 결혼식’에서 주인공 애니는 실수로 오랜 친구의 약혼식을 망친 뒤 괴로워하며 “이제 난 친구가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약혼식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메건은 그녀를 걱정하며 찾아와 “너는 왜 나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냐”라고 묻는다. 친구는 ‘오래되고, 깊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새로 만난 메건을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애니는 오히려 ‘자신을 잘 모르는’ 메건과 새로 맺는 얕지만 따뜻한 우정을 통해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영화 '내 여자 친구의 결혼식'

 이제 친구의 정의, 우정의 의미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내 모든 걸 아는 친구, 오래 숙성된 우정이 가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깊은 관계만을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맺는 새로운 유형의 다양한 인간관계는 모두 친구가 아닌 게 돼버린다. 달라진 세상에서 과거의 기준으로 지금의 내 인간관계를 폄하하며 친구가 없다고 한탄하고, 자신을 사회생활의 패배자로 여긴다면, 그래서 그런 친구를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고, 그런 우정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감정을 소모해야 한다면, 그런 친구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비록 깊지 않더라도, 오래되지 않았더라도, 직접 만날 수 없어도, 누구나 친구는 많다. 단지 친구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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