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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Mar 11. 2020

남자가 축구를 잘 못한다는 것

아끼는 후배 기자 R이 임신부였던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아기가 아무래도 아들인 거 같은데, 아들을 낳으면 아이에게 어떤 걸 해줘야 하겠냐고. 딸만 셋인 집의 막내인 R은 임신 와중에도 평소 궁금한 건 못 참는 기자 스타일 그대로 자신이 보기에 괜찮게 자랐다고 생각되는 남자들에게 ‘바람직한 아들 양육법’에 대해 묻고 다니던 터였다. 난 듣자마자 딱 하나만 얘기했다.


“무조건 축구교실에 보내야 돼!”

 축구를 잘 못하는 나는 만약 축구를 잘했다면 내 인생이 훨씬 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군대에 입대해서 훈련소에 있던 어느 날, 군악대에서 신병을 추가로 뽑는다며 훈련병들을 찾아왔다. 음악을 좋아하고 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군악대’라는 말에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군악대 장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여기 축구 잘하는 놈 있으면 손들어봐.”


 몇 달 뒤에 있을 부대별 축구대회를 앞두고, 축구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신병을 찾고 있다는 거였다. 축구 잘하는 몇몇이 손을 들었고, 결국 그중 가장 멋진 축구 실력을 보여준 훈련병이 군악대로 선발됐다. 학창 시절 어떤 음악 실기도 만점을 놓친 적이 없었고, 합창대회 때마다 지휘를 도맡았던 나는 ‘축구를 못한다는 이유로!’ 군악대에 지원조차 해보지 못하고 탈락했다.


 훈련소를 마친 뒤에는 더 큰 고난이 찾아왔다. 훈련소 마지막 날 전경으로 차출돼 경북의 한 경찰서로 배치받았는데, 주말만 되면 전경과 의경의 자존심을 건 축구 대결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워낙 시골에 있는 경찰서이다 보니, 전경이나 의경이나 인원이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아서 근무자와 휴가자 등을 제외하고 나면 전원이 뛰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병이라고 들어온 놈이 전력을 상승시키기는커녕 커다란 구멍 역할만 하고 있으니 고참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기만 했다 하면 저마다 내 뒤통수에다 대고 “뛰어!”를 연발했고, 난 저질 실력에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했기에 끊임없이 달려야만 했다. 공이 이쪽으로 가면 이쪽으로 뛰고, 저쪽으로 가면 또 저쪽으로 뛰고, 경기 내내 공에는 발 한 번 대지 못하면서 달리기만 하고 있으니, 다들 축구를 하는데 나만 혼자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격이었다. 언제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해대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나마 경기가 이기면 다행. 지기라도 하면 경기 뒤에는 더 끔찍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차려였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고참들은 후임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해댔고, 여지없이 화살은 나에게로 날아왔다. 신병이 빠져서 뛰지를 않는다는 거였다. 경기 내내 오바이트가 올라올 정도로 끊임없이 달린 나에게 뛰지를 않는다니!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뛴다고 열심히 뛰어도 모두의 시선이 쏠려있는 공 주변에 있는 게 아니라, 항상 한 발 늦게 공이 떠난 자리에만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뛰는 모습이 보이질 않는 거였다. 그 고통스럽던 시간은 내가 고참이 되어 지긋지긋한 주말 축구시합을 없애버릴 때까지 1년 넘게 계속됐다.

 그렇게 제대와 함께 축구 못하는 남자의 비애는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회사에 들어와 신입사원으로 어리바리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부서에서 1박 2일로 워크숍을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워크숍 프로그램을 본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축구와 족구가 포함돼 있는 게 아닌가! 나처럼 운동신경이 둔한 사람은 알 텐데, 축구를 못하는 사람은 족구는 더 못한다. 축구는 그나마 여러 명이 함께 뛰니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순간이라도 있지, 족구는 공이 한 사람씩 콕콕 찍어 날아오니, 각자의 실력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워크숍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의 공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나의 처참하고 저질스런 축구실력을 모든 선배들 앞에서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 군대 신병 시절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며 마음속 밑바닥에서부터 수치심이 올라왔다. 더구나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그 부서는 ‘스포츠 취재부’였다!

 병이 났다고 하고 워크숍을 가지 말까? 그 전 날 다리를 다쳤다고 하고 붕대를 감고 나타날까?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지만 거짓말도 잘 못하는 소심한 나는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워크숍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날 워크숍이 진행된 축구장과 족구장에서는 모든 이들의 커다란 웃음 속에 공과 떨어져 혼자 허우적대는 어느 못난 남자의 슬픈 쇼가 펼쳐졌다.

 나도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열리면 한 명의 붉은 악마가 되어 열광적인 응원을 펼친다. 손흥민 선수나 이강인 선수의 골 장면을 다시 보기로 여러 번 돌려보기도 하고, 프리미어 리그에서 나오는 멋진 플레이에 열광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결코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보는 걸 좋아하는 것과 하는 걸 즐기는 건 다른 문제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고 누구나 피겨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집단 문화에는 여전히 조직력을 키운다는 이유로 무조건 다 함께 같은 걸  해야 하는 문화가 있다. 다 함께 회식을 해야 하고, 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파도타기를 해야 하고, 다 함께 MT를 가야 하고, 다 함께 운동을 해야 한다. 나는 그 안에도 일종의 폭력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사람은 취향이 달라도 다수의 취향에 맞춰야만 하는 획일화된 문화다. 요즘은 잘 나가는 기업일수록 직원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개성을 살려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변화를 선도하는 조직이야 말로 미래사회에 더 적합한 조직이 아닐까.

 후배 기자 R이 아들한테 무엇을 해줘야 하겠냐고 나에게 다시 묻는다면, 무조건 축구교실에 보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아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게 해 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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