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팬이다. TV를 너무 좋아해서 매일 엄마에게 혼나던 어린 시절, MBC라는 방송사 이름과 ‘청룡’이라는 팀명이 왠지 멋있어서 MBC 청룡 팬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 되면서 시작된 ‘팬 살이’는 MBC 청룡이 LG 트윈스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3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
LG 트윈스의 오랜 팬들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애틋하고 짠한 정서가 있다. 암흑기로 불리던 2003년에서 2012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6668587667’이라는 비밀번호를 찍으며 주야장천 하위권을 맴돌던 당시 형성된 정서다. 그렇게 오랫동안 야구를 못하는데도 응원하는 팀을 바꾸지 않고 LG팬으로 남아있는 남자라면 딸을 줘도 아깝지 않은 1등 사윗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던 때이다.
야구를 못할 거면 그냥 시즌 처음부터 끝까지 쭉 못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매년 시즌 처음에는 상위권으로 치고 나가, 흥분한 팬들이 “올해는 달라졌어!”라며 주변에 사방팔방 설레발을 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부터 급전직하, 드라마틱한 하락으로 팬들의 입에 거품을 물게 해 주변인들로부터 DTD(Down Team is Down,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라는 비아냥과 함께 온갖 조롱과 수모를 겪게 했다.
당시에 이런 심적 고통을 공유하는 LG팬들끼리의 애틋한 마음은 실로 대단했다. 회사 복도를 지나가다 만나면 서로 아무 말 없이 어깨를 툭툭 쳐주거나, 짠한 눈빛을 교환하기도 하고, 처음 만난 사람이 LG팬이라고 하면 마치 잃어버린 형제를 찾기라도 한 듯 서로 손을 덥석 잡아 흔들기도 했다. LG 트윈스 응원 모자를 쓰고 동네 빵집에 가면 LG팬인 빵집 아저씨가 슬쩍 빵을 덤으로 얹어주고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귀에다 “힘내”라고 속삭이기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출처: LG 트윈스 갤러리 그랬던 내가 그 시절 딱 한 번 ‘혹시 내가 응원하는 팀을 바꾸게 되는 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KBO 리그 최강팀은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 와이번스였는데 타 팀 팬들이 봐도 야구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LG팬인 나도 SK의 경기는 관심 있게 지켜보곤 했다. 특히 당시 SK는 LG의 잠실 라이벌 두산을 포스트시즌 때마다 만나 실신을 시켜놓는 팀이다 보니 LG팬에게 묘한 대리만족을 안겨주기도 했다.
매일 극적인 패배로 정신 건강을 피폐하게 하는 LG 경기만 보다가 물 샐 틈 없는 수비와 탄탄한 마운드에 시원시원하게 홈런도 잘 치며 승리를 밥 먹듯 하는 SK 경기를 보니 야구를 보는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힐링이 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점차 SK 선수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SK가 이기면 환호까지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문득 겁이 났다. ‘내가 이렇게 LG팬에서 SK팬으로 바뀌는 건가?’ 야구를 끊었으면 끊었지 응원하는 팀을 바꾼다는 건 상상도 못 한 나였기에 이런 내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해 시즌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스마트폰으로 중계를 바꿔가며 LG 경기와 SK 경기를 동시에 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 지은 SK는 이기고 있었고, 포스트시즌 탈락 기록을 또 한 번 늘린 LG는 지고 있었다. 먼저 경기를 끝낸 SK의 완벽한 승리에 힘차게 환호를 하고 LG 경기로 돌렸는데, 계속 지고 있던 LG가 그날따라 웬일인지 9회에 끝내기 역전타로 승리를 거두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한 경기 이겨봐야 이제 포스트시즌은 택도 없고, 순위에도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는데, 그 별 볼 일 없는 승리 하나에 마흔이 다 된 아저씨가 혼자 훌쩍거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LG가 날 힘들게 해도 난 어쩔 수 없는 LG팬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팬심이란 이런 거구나. 멋지고 잘 나가는 모습에만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함께 겪고, 아픔의 마음도 함께 나누며 더 단단해지는 것. 그런 게 팬심이구나.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철저히 순수한 감정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머리로 재단하고 이성과 논리로 따지는 것이 아닌 거구나.
1년여 전 유튜브에서 임경아 기자와 함께 ‘마이 리틀 뉴스데스크’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매일 오후 5시를 전후해 유튜브 채널에서 한 시간 동안 그 날 있었던 뉴스들을 소개한 뒤, 시청자들의 실시간 투표로 그날 밤 메인뉴스에 보도할 아이템을 정하고, 실제로 뉴스데스크 마지막에 시청자 의견과 함께 해당 뉴스들을 보도하는 콘셉트였다. 회사 바깥에서는 뉴스 아이템 선정에 시청자를 직접 참여시킨 참신한 시도라는 호평이 많았지만 회사 안에서는 평이 썩 좋지 않았다. ‘뉴스가 예능이냐’, ‘기자냐 연예인이냐’, 여러 비판이 쏟아졌다. 시청자 수가 많기라도 하면 그 힘으로 버티련만, 방송 내내 실시간 접속자 수가 많아봐야 3백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석 달 반 만에 프로그램은 소리 소문 없이 폐지돼버리고 말았다.
방송 마지막 날, 그동안 애매한 방송 시간에도 잊지 않고 찾아준 시청자들을 위해 방송 중에 전화 연결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송 초반 악플러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열혈팬으로 바뀌어 가족처럼 응원해준 한 시청자가 눈물 젖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갑작스러운 폐지 소식에 밤새 울었다면서 채팅창에서 나에게 모진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계속 방송하면 안 되냐”며 울먹이던 한 초등학생 팬의 어머니는 아들이 마지막 방송 직전까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더 잘했으면 이들이 이렇게 눈물 흘릴 일이 없었을 텐데 잘나지 못해 그들에게 아픔을 줬다는 생각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실시간 접속자가 끝없이 들어오고, 조회수가 치솟는 인기 유튜브 채널이었다면 그들도 이토록 애틋한 팬은 아니었을 텐데, 매일 애를 써도 별로 보는 사람은 없고,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못난 채널이다 보니 그들의 마음도 그토록 짠하고 애틋했다. 그들에게 난 우승을 밥 먹 듯하며 매일 팬들을 환호하게 했던 SK 와이번스가 아니라, 장기간의 지질한 경기력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던 그 시절 LG 트윈스였던 것이다.
MBC '마이 리틀 뉴스데스크' 매주 토요일 뉴스데스크를 진행하기 위해 출근을 하다 보면 이른 아침부터 회사 광장에 길게 줄지어 서있는 ‘쇼 음악중심’ 관객들을 보게 된다. 좋아하는 가수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미세먼지가 몰아쳐도 광장에서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저녁에 뉴스를 마치고 퇴근할 때면 캄캄한 밤에도 회사 문 밖에서 라디오 출연을 마치고 나올 연예인에게 응원 한 마디 하기 위해 서있는 팬들을 보게 된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공부를 저렇게 해보라’며 눈총을 주기도 하고, ‘부모한테 저렇게 잘하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난 방송사 앞에서 밤을 새우고 ‘우리 오빠’를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소녀팬들의 그 순수한 마음을 이해한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죄가 없다. 팬들의 사랑이란 상대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하는, 그야말로 아가페적 사랑이다. 사랑은 받을 때 행복할 뿐만 아니라 줄 때 느끼는 기쁨도 크다. 그런 사랑 무한히 줄 수 있는 상대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들은 무한 팬심을 통해 함께 기쁨을 누리고 아픔을 나누며 사랑을 배운다.
요즘은 사회가 점차 다변화되고, 사람들의 취향도 다양해지면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뿐만 아니라, 정치인, 요리사, BJ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닌다. 팬의 종류도 많아졌고, 팬들의 힘도 세졌다. 그 과정에서 간혹 열광적인 팬심이 배타적이거나 폭력적인 모습으로 표출돼 ‘빠’라는 단어로 비하되기도 한다. 우상에 대한 팬들의 절대적 사랑이 다른 누군가에 대한 혐오로 변질돼 왜곡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건 진정한 팬심이 아니다. 팬심이 가진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혐오’가 아닌, ‘사랑’으로 표출되길 바란다. 누군가의 ‘빠’만이 할 수 있는 절대적 사랑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은 사랑을 키워내길, 그렇게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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