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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May 18. 2020

후배가 내 직장 상사가 된다면

 지난해 만난 한 LG그룹 직원으로부터 흥미로운 실험 얘기를 들었다. 회사에서 한 달에 하루씩 임원과 팀장이 출근하지 않는 ‘리더 없는 날’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성원들이 조직 책임자가 없는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책임자들에게는 재충전의 기회를 주기 위한’ 취지라는데, 모든 업무가 팀장(혹은 부장)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직장 분위기 속에서 처음 들어보는 이색적인 시도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차라리 팀장이 없으면 일이 훨씬 더 잘 풀리지 않을까’하는 위험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기에 그 실험의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단 ‘하루’라는 실험 기간이었다. 팀장이 없는 진짜 효과를 보려면 하루 정도가 아니라 최소 일주일, 가능하면 아예 한 달 정도 팀장 없이 팀원들끼리 일을 해봐야 더 확실하게 그 효과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만난 한 SK그룹 직원은 더 파격적인 실험 소식을 전해줬다. 일부 계열사에서 신입사원에게 일정 기간 동안 팀장을 맡기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시각에 물들지 않은,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신입사원에게 한정된 기간이나마 책임자의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조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자 하는 의도로 읽히는데, 갑자기 중책을 부여받은 신입사원이나, 새파랗게 나이 어린 후배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선배들이나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떻게 이런 실험이 가능한지 물었더니, 이미 회사 내에서 연차와 상관없이 보직을 맡기기 시작한 지 꽤 됐다고 설명해줬다. 경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선배가 후배 팀장 밑에서 일하는 것이 처음에는 서로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일을 하다 보니 그런 변화에 적응해가기 시작했고, 차차 그런 나이나 연차 문제가 잊혀갔다고 한다.


 국내 기업들이 이렇게 팀장을 없애보고, 아랫사람에게 팀장을 맡기기도 하는 건 얼마나 우리의 수직적인 조직문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변화하려 몸부림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상하관계를 따지는 우리의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나있지 않은가. 사람을 만나면 우선 나이부터 물어보고 형과 언니, 동생을 가린 뒤 존댓말과 반말로 가르는 철저한 상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평생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다 보니 그 관계가 역전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직에서 연차 높은 사람을 그보다 낮은 사람의 아래에 발령하는 건 모욕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아예 회사를 나가라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회사들이 그런 식으로 조직을 운영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상하관계가 엄격한 조직인 검찰의 경우 후배나 동기가 총장이 되면 그 윗 기수와 같은 기수는 다 함께 사표를 내고 물러나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계 역시 조직 문화가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곳이다. 처음 입사한 순간부터 선배로부터 1대 1로 도제식 교육을 받고, 이 과정에서 ‘이 새끼’, ‘저 새끼’, ‘X새끼’ 소리를 들으며 훈련돼 왔으니 이런 곳에서 후배가 선배의 권위를 넘어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인사가 날 때마다 보직 연차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보직의 후보가 되고, 그중 딱히 특정 보직에 대한 경력이나 전문성 있는 사람이 없어도, 어떻게든 그 사람들 중에 보직자를 찾아 맡기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분야에서 누가 봐도 뛰어난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나이가 들어 해당 연차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리더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두 달 전 새로 발령받은 부서에서 그런 상하관계의 역전을 경험하고 있다. 이곳은 뉴스의 새로운 형식과 콘텐츠를 실험하고 발굴하는 곳으로, 그동안 혁신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언론계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로드맨’, ‘소수의견’, ‘법이 없다’와 같은 MBC 뉴스데스크의 대표 코너들이 바로 이곳에서 개발됐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곳인 만큼 구성원들 역시 젊은 기자들로 채워져 있는데, 나보다 5년 후배인 N기자가 이곳의 리더다. 팀의 일정을 관리하고, 회의를 주재하고, 위에 보고를 하는 것 모두 N기자의 몫이다. 열정 넘치고 센스 있는 젊은 후배의 리드에 나를 포함한 그의 선배들과 동기들은 모두 그를 믿고 따른다. 후배가 리더이다 보니 조직에서 권위의식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거의 매일 열리는 아이디어 회의에서 팀원과 스태프들은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낸다. 누구나 편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니, 좋은 성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뉴스에서 최초로 브이로그를 시도한 ‘앵커로그’를 선보였고, 새로운 스타일의 팩트체크 코너인 ‘팩트의 무게’도 출격을 앞두고 있다.

 나는 여기서 새로운 조직 문화의 가능성을 본다. N기자는 물론 함께 일하는 로드맨의 Y기자와 S영상기자, ‘소수의견’과 ‘법이 없다’를 탄생시킨 K기자 역시 모두 나보다 후배이지만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친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이런 후배들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직장상사로 모시고 일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에 대해 함께 공유하는 열정과 서로 존중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가 나이가 많고 연차가 높은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랜 시간 안정적 성장을 지속해 오던 시대에는 성장의 경험을 축적한 연장자가 가장 유능하고 적합한 리더였다. 그런 리더의 지휘 아래 조직원들은 경험을 공유하고 배우며 성장해 갔다. 하지만 지금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과 변화에 맞닥뜨려야 하는 시대에는 ‘새로움을 주장하는 리더’가 아니라 ‘새로움으로 무장한 리더’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윗세대의 경험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패기와 열정으로 앞에서 이끄는 젊은 리더 뒤에서 경험과 노하우로 뒷받침해줄 노련한 참모가 있어야 한다.

 핀란드에서 34세 여성이 총리직에 올랐다. 같은 유교문화권인 일본에서는 44세의 오사카 지사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아베 총리와 차별화된 발 빠른 대처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조직에서 연차가 높다는 이유로 책임자가 되고,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들러리를 서는 시대는 이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과 조직은 낙오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열정과 패기, 도전과 창의로 뭉친 젊은 리더들이 앞에 나서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주길 기대해본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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