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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Apr 27. 2020

적성 안 맞는 직장인의 이중생활

 회사에서 일을 하다 지친 후배들이 종종 축 처진 어깨와 풀이 죽은 얼굴로 찾아와 고민을 토로하곤 한다. 그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저는 이 일하고 안 맞는 거 같아요.”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눈빛은 깊은 좌절감에 젖어있다. 그런 후배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준다.


 “넌 아직도 그걸 고민하냐? 난 고민 끝낸 지 오래됐어. 나랑 이 일은 안 맞는 걸로.”


 그럼 대부분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도 가벼워진다. ‘다 그렇구나’.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

 직장에서 같은 일을 17년째 해오다 보니 좋은 기억 못지않게 좌절의 순간도 많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직업이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건 아닐까 고민도 참 많이 했다. 그런 고민이 가장 심각했던 때는 입사하고 7,8년쯤 지났을 때였다. 이제 더 이상 어리다는 이유로 실수를 용서받을 수 없고, 능력을 보여줘야만 하는 시기였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빨리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이 끊임없이 나를 조여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의욕이 커지는 만큼 성과가 커지지는 않았고, 눈높이가 높아지는 만큼 능력치가 올라가지도 않았다.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게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기분 전환할 겸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갔다. 작품은 전설적인 그룹 아바의 흥겨운 음악들로 가득 찬 뮤지컬 ‘맘마미아’였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춤과 신나는 음악에 흠뻑 젖어 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린 시절, 뮤지컬을 하고 싶었던 꿈이 가슴속 밑바닥에서 되살아난 것이었다. 저들은 저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사는데, 왜 나는 매일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까. 아바의 신나는 음악에 맞춰 손뼉 치고 몸을 흔들며 좋아하는 수많은 관객들 속에서 나는 혼자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뮤지컬 '맘마미아'

 그날 밤 이불속에 들어가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인터넷을 접속했다. 혹시 나처럼 뮤지컬의 꿈을 포기하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또 있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키워드를 넣어 검색을 하기를 두세 시간, 포기하고 자려는데 한 동호회의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직장인들이 모여 함께 뮤지컬 공연을 만드는 모임에서 회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공고 내용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럴 수가! 하루 전에 모집이 끝난 게 아닌가. 한참을 고하다 동호회 회장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지 절절 마음을 담다. 내 진심이 통한 것이었을까. 다음날 동호회에서 함께 하자는 답장이 왔다.

 그 날 이후 마흔이 다 된 나의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고 주말이 되면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에 갈 때면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버스에서 내려 뛰어갔다. 연습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직장인들과 함께 뮤지컬을 공부하고 공연을 만들어 갔다. 직장에 갓 들어간 20대 여직원부터 쉰을 바라보는 중년의 아저씨까지 뮤지컬을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열정이 모였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한 회원은 다른 회원들을 부를 때마다 자꾸만 입에 밴 ‘고객님’이라는 호칭을 써서 모두를 박장대소하게 했고, 운송업에 종사하는 어떤 회원은 연습실 앞에 대형 트럭을 몰고 와 깜짝 놀라게 했다.

 모든 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갔다. 버려진 나무들을 구해와 망치질을 해서 무대를 만들고, 시장에서 천을 사 와 직접 재단해가며 막을 만들었다. 무대 의상을 바느질하고, 소품을 구해오고, 포스터와 전단지를 디자인하고....... 해야 할 일은 늘어가고 피로는 쌓여갔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무대는 볼품없고, 관객은 지인들 몇십 명에 불과했지만 우리에겐 이 소박한 공연이 브로드웨이의 대형 뮤지컬보다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공연이 거듭되면서 경험이 쌓이자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 적성도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했던 만큼, 뮤지컬 대본을 쓸 때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 정식으로 뮤지컬 창작을 공부하고 대본을 써서 창작 뮤지컬 대본 공모전에 도전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해서일까. 도전 첫 해에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과 CJ문화재단이 주최하는 두 개의 창작 뮤지컬 공모전에 연달아 작품이 당선돼 정식으로 뮤지컬 작가로 데뷔하게 됐다.

 뮤지컬 데뷔작 '내 인생의 특종'과 '특수병동' 포스터

 내 머릿속에만 있던 이야기들이 음악이 되고, 대사가 되어 무대에서 펼쳐지는 걸 지켜보는 건 꿈처럼 행복했다. 뮤지컬계에서 내로라하는 연출가와 스태프, 배우들이 내가 쓴 대본으로 공연을 만들어가는 건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 공연이 임박할 때면 퇴근 후 밤을 꼬박 새우며 대본을 고쳐서 연습실로 보내고, 그대로 다시 출근해 코피를 쏟아가며 일을 해야 했지만 내 안에서 나도 모르던 에너지가 끝없이 솟아났다.

 더 놀라운 건 회사 생활의 변화였다. 내 피를 끓게 하는 다른 일이 생기면서 직장에서의 자아실현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자, 부담감이 사라 스트레스가 줄어들일하는 게 다시 즐거워졌. 일을 즐기니까 자연스럽게 업무 능률도 오르고 성과도 좋아졌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고민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하는 영원한 ‘화두’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직장인에게 적성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라는 조언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난 마흔이 다 된 나이에 꿈을 향한 도전에 나섰지만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중 꼭 하나만 하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한 가지에 가둬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에서 꼭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많아진다. 지금 이 순간, 자꾸만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무언가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할 수 있을까’, ‘잘 될까’, ‘시간이 날까’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봤으면 좋겠다.  생각지도 못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결국 잘 되면 좋겠지만 잘 안되면 또 어떤가. 꿈을 향해 달려간 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뮤지컬 '내 인생의 특종'
뮤지컬 '특수병동' (CJ 아지트)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www.instagram.com/kkh_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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