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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Jun 11. 2020

아버지와의 이별

 새벽 5시 20분. 휴대폰이 울렸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취재 일정이 있어 자기 전에 5시 30분으로 알람을 맞춰놓았기에 당연히 알람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휴대폰 화면을 보니 알람이 아닌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 중인 병원의 간호사실이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얘기인 것 같아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에 갑자기 아버님 상태가 안 좋아서 응급조치를 했거든요. 그런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전날 오후에도 멀쩡하게 인사를 하고 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황급히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전날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 똑같았다. 평소처럼 주름살 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팔을 만져보니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었다. 


“아빠!”


 하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을 자다가도 내가 가면 눈을 떠서 아는 척을 하던 그 따뜻한 눈빛을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엄마에게 어떻게 전하지? 가슴이 꽉 막혔다. 전화를 걸 순 없었다. 혼자 계신 엄마가 충격으로 쓰러지실까 걱정이 됐다. 급히 차를 몰고 엄마에게 향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하지? 어떤 말로 시작해야 충격을 덜 받으실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운전을 해서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른 새벽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놀란 엄마가 물었다.


“아빠한테 무슨 일 있니?”


 내가 정확히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곧바로 아버지의 소식을 전했고, 엄마를 위로했고,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고,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모시고....... 그렇게 아버지 없는 1주일이 흘러갔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었다. 아버지가 3년 전부터 당뇨합병증을 앓아오셨고, 두어 달 전부터 뇌출혈과 폐렴으로 병원에서 입원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셨지만 난 단 한순간도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집에는 아버지가 퇴원 후 이용할 병원 침대와 휠체어를 새로 준비해 놓았고, 아버지가 보실 TV를 새로 설치해서 케이블 TV까지 연결해 놓은 상태였다. 돌아가시기 전 날 혈액검사에서도 당뇨, 폐렴 모두 정상수치에 근접한 걸로 나와, 그 날부터 드시는 약을 줄이자는 의사 처방도 나왔었다. 그렇게 힘든 투병생활을 다 이겨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허망하게 아무런 예고도, 준비도 없이 가족 곁을 훌쩍 떠나버리시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촘촘히 짜인 장례일정을 치르고 조문객을 맞다 보니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슬픔의 시간은 그 이후부터 찾아왔다.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 생각이 나고, 그럴 때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버지의 힘들었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고, 아버지에게 못했던 것들이 생각나,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서 가슴을 긁어내는 듯 고통스럽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50년을 함께 하며 숱한 삶의 파고들을 이겨내 온 짝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아버지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일부러 딴생각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시기에 슬픔을 충분히 풀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어 슬픔을 마주하지 않고 회피한다.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기리는 글 하나는 남기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생각에 노트북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화요일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목요일 발인까지 모두 주중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주말 뉴스 앵커인 내게 지난 주말 다른 앵커를 대신 투입해 주겠다며 쉬라고 했다. 하지만 난 아버지가 화요일에 떠나신 건 평소 자식 일에 지장을 주는 걸 꺼렸던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생각해 그대로 뉴스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방적회사의 공장 노동자로, 은퇴 이후에는 건물 경비로 일하며 평생을 고되게 사셨다. 내가 취업해 생활비를 벌기 전까지 아버지는 한순간도 경제적인 여유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건 사람들에게 뭐든 나눠주는 거였다.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이것저것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 돈이 넉넉지 않으면 천 원짜리라도 사서 나눠주셨고, 돈이 없으면 엄마 몰래 집에 있는 물건을 들고나가서 나눠주셨다. 심지어 집에서 가족이 쓰고 있는 물건을 팔아서 사람들한테 나눠주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엄마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고, 난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다. 

 노후에는 본인 쓸 용돈이 부족해도 장애어린이 보호기관에 매달 꼬박꼬박 기부하는 건 잊지 않으셨다. 그렇게 나눠주면서도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대가를 바란 적이 없었고, 아까워한 적이 없었다. 그게 아버지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빈소에 찾아온 이들은 아버지가 아낌없이 나눠주셨던 추억들을 얘기하며 울고 웃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평생 아기 같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분으로 기억했다. 난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하거나, 해를 끼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본인이 손해를 볼지언정 남에게 안 좋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평생 빛나는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고, 밑에 사람을 거느려본 적도 거의 없었지만, 난 그런 아버지가 누구보다 멋지고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는 입관식에서 난 아버지에게 약속했다. 나도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으로 살겠다고.


아버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故 김국태 (1938.3.9 ~ 20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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