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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Jul 27. 2020

아버지가 몰래 의사에게 한 말

 군대에서 자대 배치를 받고 몇 달 지났을 때였다. 화장실에서 혼자 눈물을 닦고 있는데 불쑥 문이 열리며 선임이 들어왔다. 평소 후임들을 잘 챙겨주던 마음 착한 선임이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인사하고 얼른 고개를 돌렸는데, 눈치 빠른 선임이 내 상태를 알아채고는 이유를 물었다. 잠시 주저하다 솔직하게 사정을 얘기했다. 괜히 오해를 사기라도 하면 부적응자나 관심사병 딱지가 붙을 수도 있는 곳이 군대였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선임은 곧 내무반장을 만나러 갔고, 난 얼마 뒤 며칠간의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갔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 난 엄마와 전화 통화를 했었다. 평소보다 많이 가라앉은 엄마의 목소리에 느낌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지만 엄마는 아무 일 없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그럴수록 더 느낌이 좋지 않아 계속 캐묻자 엄마가 마지못해 이유를 털어놓았다. 며칠 전부터 왼쪽 눈이 잘 안 보인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미 오른쪽 눈이 실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파 줄줄 눈물이 흘렀다. 그때 마침 선임이 화장실에 들어온 거였다.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가니 갑작스러운 아들의 방문에 엄마는 한없이 좋아했다. 반갑고 기쁜 마음에 온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야 한다며 함께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전화 통화 때 무겁게 가라앉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경쾌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새 다시 눈이 좋아진 건지 엄마에게선 딱히 전과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함께 장을 보러 집을 나서자 금세 티가 났다. 엄마는 가는 곳마다 앞에 있는 벽과 기둥에 부딪쳤다. 낮은 문턱 하나도 쉽게 지나가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졌다. 잘 보니 얼굴도, 다리도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젊은 시절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셨던 엄마는 남에게 빈틈을 잘 보이지 않는 분이셨다. 항상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을 유지하던 엄마가 자꾸만 부딪치고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로 마구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엄마 눈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날 더 힘들게 한 건 아버지의 태도였다. 엄마가 넘어질 때마다 나무라고, 잘 보이지 않아 실수할 때마다 짜증을 냈다. 아버지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위축되는 모습이었다. 가뜩이나 힘든 엄마가 아버지로 인해 더 힘들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럴 때마다 화를 꾹꾹 눌러가며 군대로 복귀하기 전 아버지에게 제대로 한 번 터뜨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며칠 뒤 대학병원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의 병이 유전적 요인에 의해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병으로, 현재로서는 진행이 늦어지길 바라야 할 뿐,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병명이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걸 안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은 얼마 전 아버지를 만난 얘기를 해줬다.


“아버님께서 본인의 눈을 어머니에게 이식해달라고 하셨어요.”


 엄마의 치료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본인의 눈 하나를 통째로 떼어내서 엄마에게 이식해달라고 간청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의술로는 안구 이식으로도 치료할 수가 없어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며  의사 선생님은 안타까워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뜻 눈 하나를 떼어 줄 수 있는 사랑.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 깊은 사랑을 알지도 못한 채 아버지를 원망하고, 마치 세상에 나보다 더 엄마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겼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시력이 안 좋아진 엄마 앞에서 보인 아버지의 짜증은 사무치는 아픔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원래 시력이 좋았던 사람이 점점 앞을 잘 못 보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엄마의 시력이 궁금해서 한쪽 눈을 감고 나머지 한쪽 눈을 아주 미세하게 떠보니 그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고통을 가족 앞에서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다. 이후에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시력이 안 좋아졌지만 엄마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가족의 뒷바라지를 해냈다. 그 눈으로 매일 새벽 뒷산에 있는 절에 올라가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엄마의 지극한 정성에 탄복한 신도들이 엄마가 기도하는 자리는 평소에도 항상 비워놓을 정도였다. 엄마 눈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도 엄마는 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눈이 돼주었다. 엄마가 가고 싶어 하는 곳에 엄마를 붙잡고 함께 발걸음을 했고, 엄마가 필요한 것들은 장에 가서 대신 사 왔다. 때로는 퉁명도 부리고 짜증도 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엄마의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얼마전 세상을 떠나셨다. 눈이 돼주고, 발이 돼주었던 평생의 동반자를 떠나보낸 엄마의 상실감을 내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버지를 납골당에 모시고 오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딱 하나만 부탁드린다고. 엄마 눈이 더 나빠지지 않게 아버지가 힘을 써달라고. 그거 하나면 된다고.

 오랜 세월 엄마가 매일 새벽에 날 위해 기도해주었듯 이제는 내가 매일 밤 엄마를 위해 기도한다. 엄마의 눈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를. 이제는 하늘나라에 간 아버지가 그렇게 엄마의 눈을 지켜 주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난 오늘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덧붙이는 말)

이 글을 읽으신 분 가운데 망막색소변성증의 관리와 치료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공유해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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