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나는 책을 꽤 많이 읽는 어린이였다. 내 방에는 항상 책꽂이에 여러 책들이 꽂혀 있었다. 특히 사촌 형이 커서 더 이상 읽지 않는다며 이모 집에서 엄마가 받아온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은 내가 유난히 좋아하던 책들이었다. ‘ABE세계문학’이라는 책이었는데, 100권 가까이 되는, 초등학생으로서는 엄청난 양이었다. 권당 2,3백 페이지에서 많게는 4백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들이었지만 나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몇 시간씩 한 자리에 앉아서 뚝딱 다 읽어냈다. 하얀색 딱딱한 표지에 검은색 고딕체로 굵게 새겨진 책의 제목들은 지금도 줄줄이 떠오른다. 특히 ‘로러 잉걸스 와일더’라는 작가의 책을 좋아했는데, 그가 쓴 ‘초원의 집’, ‘우리 읍내’라는 책을 읽은 뒤 혼자 한동안 미국 서부의 마을을 상상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읽어 내려간 책들은 시골 소년의 좁디좁은 세상을 이곳 저곳으로 끝없이 넓혀주는 마법의 양탄자와도 같았다. 전집을 거의 다 읽고 나면 엄마는 다시 주변의 아는 사람 집에서 자녀가 중, 고등학생이 되어 더 이상 읽지 않게 된 어린이 책들을 구해 와서 책꽂이에 꽂아주곤 했다.
ABE세계문학. 내가 좋아했던 '초원의 집'과 '우리 읍내'가 꽂혀있다. (출처: 와우서점 블로그)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내가 전혀 책을 좋아하는 어린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건 TV였다. TV를 너무나 좋아해서 집에 있을 때는 몇 시간이고 채널을 돌려가며 머리가 아프도록 TV를 봤다. 방송사들의 요일별 편성표를 줄줄이 꿰고 있었고, 심지어 자면서도 TV를 보는 꿈을 꿨다.
그런 나를 독서에 빠져들게 하는 엄마의 방법이 있었다. 내가 집에서 뒹굴거리며 한참 TV에 빠져 있으면 엄마는 어김없이 내게 게임을 제안해 왔다. 엄마가 만든 게임인데, 이름 하여 ‘빨리 읽기’ 게임이다. 게임의 룰은 아주 간단했다. 책꽂이에서 서로 상대가 읽을 책을 골라주고 동시에 책을 읽기 시작해서 먼저 자기 책을 다 읽는 사람이 이기는 거였다.
게임에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소원 하나를 들어줘야만 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무조건 책꽂이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골라서 엄마에게 내밀었다. 반면 엄마는 두께와 상관없이 그때마다 이런저런 책을 골라서 줬다. 그때는 엄마가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가 나름의 기준으로 나에게 읽힐 책들을 골라준 거였다.
게임을 시작하면 엄마는 자리에 앉아서 내가 골라준 두꺼운 책을 몇 시간이고 읽었다. 나도 엄마 옆에서 게임에 이기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었다. 어떻게든 게임에 이기고 싶으면 속임수를 써서 몇 페이지씩 건너뛰며 읽어도 됐을 텐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갈 정도로 엄선된 유명 작가들이 쓴 작품들이니 얼마나 재미있겠나.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책을 읽기 시작해도 3,40페이지를 넘어가면 작품의 재미에 푹 빠져서 한 페이지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난 득의양양하게 승리를 외쳤다. 그거 이기는 게 뭐라고 난 엄마보다 먼저 책을 다 읽으면 게임에서 이겼다고 좋아라 했다. 그때 엄마에게 어떤 소원을 말할지 궁리하며 설렜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다고 게임에서 졌다고 독서를 중단한 적은 없었다. 이미 책을 거의 다 읽어가는 마당에 작품의 결말이 궁금해서 도저히 독서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단 한 번도 책 읽으라는 소리를 안 하고도 독서에 취미 없는 어린이가 수백 권의 책을 읽게 만들었다.
그때 내가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엄마가 항상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지 않고 본인이 먼저 책을 읽었다. 더구나 성인인 엄마가 읽기에 다소 유치했을 어린이 문학을 나와 함께 하나하나 끝까지 다 읽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엄마 눈높이에 맞는 다른 책들을 읽는 게 훨씬 더 즐거웠을 테지만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독서량이 늘어갈수록 난 책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집중력도 좋아졌다. 독서가 끝나고 나면 엄마한테 책의 내용을 나불나불 떠들어대다 보니 어느새 책의 요점을 파악하고 요약하는 능력도 향상됐다. 덕분에 학교에서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눈에 띄게 글을 빨리 읽고 요점도 잘 찾아냈던 기억이 난다.
뉴스앵커를 하다 보니 매일 누구보다 많은 기사를 읽게 된다. 뉴스를 진행하는 날이면 제일 먼저 그 날 쏟아진 모든 기사들을 다 읽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그 많은 기사들에서 이 시점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건 우리 기자들이 힘들게 취재해서 쓴 기사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앵커멘트를 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사를 꼼꼼히 읽으며 문장 사이에 숨어있는 기자의 의도를 잘 찾아내야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이렇게 읽고, 쓰고, 말하는 직업을 갖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 엄마와 했던 그 게임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매일 읽고 쓰는 일이 나에겐 가장 익숙하고 즐거운 일이니 말이다. 아마도 그때 엄마는 다 계획이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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