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D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지갑에 5천 원짜리 지폐를 챙긴다. 집에 여러 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챙기고, 한 장만 있으면 한 장이라도 갖고 나간다. 평소에도 5천 원짜리 지폐가 생기면 쓰지 않고 모아둔다. 5천 원짜리 지폐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은 은행에 가서 교환해오기도 한다. 그리고 길을 가다 폐지 모으는 어르신들을 만나면 지갑에 있는 5천 원을 드린다.
“감사합니다. 음료수라도 사드세요.”
집에서 쉬다가도 밖에서 폐지 모으는 소리가 들리면 5천 원을 챙겨 나가고,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길에서 폐지가 가득한 리어카를 끄는 어르신이 보이면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가서 5천 원을 드린다. 상대가 누구인지, 지역이 어디인지 가리지 않는다. 어디서든 폐지 모으는 어르신이 보이면 보이는 대로 가서 지갑을 연다.
어르신들은 대부분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이내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5천 원을 꼭 쥔 채 고맙다는 말을 반복한다. 고달픈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얼굴에서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기운이 감돈다.
D가 이런 일을 시작한 건 몇 년 전 한 택시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급히 택시를 잡아탄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고서야 지갑도, 스마트폰도 모두 집에 놓고 왔다는 걸 알았다. 택시 요금은 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가 어쩔 줄 몰라하며 택시기사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주면 꼭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송금을 하겠다고 하자 택시기사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 돈 안 받을 테니까, 대신 꼭 좋은 일에 쓰세요.”
택시기사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택시에서 내린 D는 일을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좋은 일에 그 돈을 쓸지 생각했다. 그런데 좀처럼 어디에 써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기부 단체에 몇 천 원을 기부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돈을 쓰지 않자니 영 마음이 찝찝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택시기사와의 지키지 못한 약속이 마음에 짐처럼 남아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앞에서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혼자 힘겹게 끌고 가는 할머니가 보였다. 평생을 고생만 하며 살았을 할머니가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할 정도로 쇠약한 몸을 혹사시키며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 순간 불현듯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곧바로 할머니에게 다가간 그는 지갑에 있던 돈을 드리고 자리를 떴다. 그 날 이후 그는 길을 지날 때마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어르신들한테 5천 원씩 드리다 보니 이제는 그게 당연한 일상이 됐다. 뉴스에 따르면, 이렇게 폐지 줍는 어르신 한 분이 보통 하루종일 온힘을 다해 모으는 폐지는 100kg 안팎으로, 그걸 다 팔아서 버는 돈은 3,4천 원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 어르신들에게 5천 원은 하루 일당보다도 많은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MBC 뉴스데스크 그런데 왜 꼭 5천 원일까. 만 원을 드릴까도 생각해봤지만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워낙 자주 보이다 보니 매번 만 원씩 드리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그러다가는 얼마 못가 이걸 그만두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민을 해보니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부담 없고 기분 나쁘지 않은 액수가 커피 한 잔 값 정도인 5천 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분들을 돕는 단체를 찾아 기부를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정기적으로 일정한 액수를 기부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했고, 그분들 입장에서 단돈 얼마라도 직접 받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어르신들을 만난 날은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며, 비록 큰돈은 아니지만 어르신들도 그 5천 원을 받은 날만큼은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D가 유난히 돈이 많은 건 아니다. 서른 살 무렵부터 혼자 힘으로 자영업을 해온 D는 친구들 사이에서 알뜰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꼭 필요한 물건도 항상 중고부터 찾다 보니 가족한테 ‘궁상 좀 그만 떨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평소 가게를 운영하면서 나오는 철물이나 유리병 등 되팔 수 있는 것들은 따로 정성스럽게 모아두는데, 일정량이 모이면 동네 폐지 줍는 할머니를 불러서 모두 드린다. 얼마 전에는 그렇게 D의 가게에서 가져간 철제 가구들을 되팔아서 큰돈을 벌었다며 할머니가 귤 한 상자를 사 와 가게 앞에 두고 가시기도 했다.
그런 D를 보며 20여 년 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당시 한 상가에서 경비 일을 하고 있었는데, 퇴근해서 집에 오시면 그 건물에서 작은 의원을 운영하던 젊은 의사 한 분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곤 하셨다. 말씀을 들어보니 이 의사는 저녁에 의원 문을 닫고 퇴근할 때면 경비실에 있는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꼭 음료수라도 사드시라며 몇천 원씩을 주고 갔다고 한다.
박봉에 용돈도 얼마 없었던 아버지에게는 그 몇천 원이 큰 선물이었다. 그 돈으로 퇴근길에 과일 몇 개, 혹은 과자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와서 뿌듯한 얼굴로 가족에게 주시기도 했고, 좋아하는 막걸리를 사들고 와서 저녁식사와 함께 약주를 하시기도 했다. 의사에게는 그 돈이 그리 큰돈이 아니었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그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으로 매일 고된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세상에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어디 있냐"며 "너도 나중에 크면 꼭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 의사가 누구인지 알면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보답을 하고 싶은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친구 D를 보면 기부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많은 돈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위를 한 번만 둘러보면 누구나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기부가 있지 않을까.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큰 기부도 가치 있지만, 어쩌면 우리 사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건 이런 생활 속의 작은 기부, 소소한 기부가 아닐까 싶다. 나도 5천 원짜리 지폐가 보이면 딴 데 쓰지 않고 주머니에 꼭 넣어서 갖고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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