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연말이다. 커피숍에서는 벌써부터 사람 마음 괜히 설레게 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거리에서는 한 해가 마감돼 감을 깨우쳐주는 듯한 구세군의 종소리도 들릴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그 해 연말의 기부 액수를 알려주는 ‘사랑의 온도계’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옷깃에는 이웃 돕기를 상징하는 새빨간 ‘사랑의 열매’가 달린다. 기부를 꼭 연말에만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아무래도 찬바람이 불면 외로운 사람은 더 쓸쓸해지고, 어려운 사람은 더 절실하게 삶의 무게를 느끼게 되는 만큼 이때만이라도 주변 사람을 한 번 돌아보고 마음을 나누자는 뜻인 것 같다.
이때마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게 익명 기부자들의 선행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살아있는 성자(聖者) 같은 익명 기부자들의 기부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신혼부부는 결혼식 축의금 1억 1000만 원을 “치료 사각지대에 있는 국내외 아동, 청소년들의 치료비로 써 달라”며 한 병원에 익명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축의금이 1억이 넘는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걸 몽땅 '익명'으로 기부하다니....... 인천 강화군에 사는 한 농부는 본인이 직접 지은 쌀 40포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해달라며 올해로 17년째 익명으로 동사무소에 기부했다고 한다. 쌀 한 포가 10kg이니 엄청나게 많은 양이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면서, 한 편으로는 그분들의 마음이 참 궁금하기도 하다. 굳이 기부를 ‘익명’으로 하는 이유는 뭘까. 보통 사람들로서는 남을 위해 기부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비밀로 하는 건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돈보다 더 포기하기 힘든 게 명성이나 명예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입이 근질근질해서 그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그런데 영광스럽게도 그런 익명 기부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그분의 신원과 기부 과정, 그리고 그 배경은 모두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몇 년 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사례들을 찾고 있었는데, 한 단체를 통해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여성이 이 단체를 통해 뇌병변 장애아의 부모들에게 천만 원씩을 전달해주고 있는데, 자신의 신분에 대해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중한 돈을 받은 부모들이 너무도 고마운 마음에 기부자의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것조차 절대로 알려주지 말라는 기부자의 뜻에 따라 비밀로 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그 기부자가 이 단체를 통해 익명으로 기부한 돈만 5천만 원이 넘는다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그걸 왜 꼭 익명으로 하는지 궁금했다.
단체를 통해 기부자에게 한 번 만나볼 수 있는지 여쭤봐 달라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역시 예상대로 ‘NO’였다. 다시 연락을 해서 다큐멘터리 제작 취지를 설명하고, 철저히 신분을 가릴 테니 사람들에게 이런 기부 문화가 확산되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한 번만 얘기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기부자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단, 인터뷰를 하되, 기부자의 신원을 비밀로 하고, 얼굴과 목소리는 철저히 가리는 조건이었다.
어느 평일 날 저녁으로 약속이 잡혔다. 기부자가 일을 하기 때문에 퇴근 이후에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가 진 뒤 드디어 익명 기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큰 액수를 기부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중년의 여성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기부자는 30대의 젊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그분의 직업이었다.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나 전문직이 아닌, 평범한 대기업에 다니는 보통의 직장인이었다. 월급이 뻔한 직장인이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기부할 수 있을까. 원래부터 집안에 돈이 많은 사람일까? 얘기를 들어보니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매달 월급을 받으면 일정 액수를 떼어내 기부를 위해 모으고, 시간이 지나서 목돈이 모이면 돈이 꼭 필요한 사람을 찾아 기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기부를 하는 이유가 뭘까?
"힘들 때 누군가 감동받을 계기를 내가 만들어주면, 1초라도 그 사람에게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마음 따뜻해지는 그런 걸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궁금했던 것, 왜 굳이 ‘익명’으로 기부하는지도 물어봤다.
“만약 누군가가 나타나서 ‘내가 너를 후원했다’고 하면 그들에게 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면에 후원자가 누구인지 모르면 그 감동만이 오래 유지될 수 있겠죠. 그래서 비밀이 저에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좋은 것 같아요.”
익명의 이유 (출처:MBC 다큐멘터리 타임)
기부받은 사람이 기부자가 누구인지 알면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느낄까 봐 걱정돼서 익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깊게 이해해주고 배려해줄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과는 아예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혹시 돈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물어봤다.
"돈에 관심이 없지는 않아요. 저도 재테크에 관심이 있어서 저축도 하고, 그 안에서 집을 넓혀볼까도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기부하는 게 꼭 저축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3년만 더하면 1억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기부하는 거죠."
아주 특별한 저축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은 익명의 기부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꼭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한 뒤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여운이 남아 그 자리를 지켰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보았던 그 익명 기부자의 따뜻한 표정과 진심 어린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 날의 만남은 내 가치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누군가에게 등대 같은 사람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의 해’로 기억될 올해, 기부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늘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만한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란다. 이 때문에 연탄 기부와 같은 물품 기부도 대폭 줄었고, 비대면의 확산으로 봉사자들의 수까지 크게 줄었다고 한다.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전보다 훨씬 더 늘었는데, 돕는 사람은 반대로 크게 줄었으니, 올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이 될 것 같다. 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는 요즘,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익명 기부자들의 진심을 한 번쯤 떠올려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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