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호 Dec 22. 2020

회사에 내 동선이 낱낱이 알려진다면...

 최근 우리 회사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첫 확진자는 예능 프로그램 조연출이었는데, 공개된 이 분의 동선이 직원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확진되기까지 일주일간의 동선을 보니, ‘편집실 – 종합편집실 – 편집실’, ‘편집실 – 회의실 – 편집실’, ‘편집실’... 이런 식이었다. 일주일 내내 편집실에 틀어박혀서 꼼짝을 못 하고 주야장천 일만 한 것이었다. 숨이 컥컥 막히는 기분으로 동선을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줄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구내식당 이용 안 함. 지하 1층 편의점 이용’


 1주일 내내 구내식당조차 한 번도 못 가고 편의점에서 식사를 때웠다는 것이다. 얼마나 일이 많고 정신이 없기에 밥조차 식당에서 먹지 못했던 것일까. 예능프로그램 조연출이 극한직업이라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그분의 일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시청자들이 즐겁게 웃고 있는 뒤에서 조연출은 자신의 열정을 속된 말로 갈아 넣고 있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확진으로 인한 동선 공개가 예능프로그램 조연출의 빡빡한 근무 현실을 회사 전체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동료들과 그분의 동선을 얘기하다 보니 다들 자신의 동선이 모두에게 낱낱이 공개된다는 건 참 난감한 일일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아무런 설명 없이 장소만 나올 수밖에 없는 동선이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외부에서 사람 만나는 일이 많은 취재기자의 경우 근무시간의 동선에 덜렁 ‘커피숍 – 커피숍 – 커피숍’이라고 적혀 있으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을까. 한 내근 직원은 화장실 가는 횟수를 좀 줄여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동선에 자꾸 화장실이 등장하면 ‘이 사람 왜 이렇게 화장실을 자주 가냐’, ‘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 아니냐’는 말이 나오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코로나19 확산 초기 확진자가 적던 시절, 확진자의 동선 하나하나가 전 국민의 놀림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서울의 한 확진자는 사흘 동안 서로 다른 모텔 세 곳에서 잔 사실이  공개되자 온갖 억측이 쏟아졌다. 출장이 잦은 사람일 수도 있고, 외부 이동이 많은 영업직일 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의심 가득한 추측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 남성 확진자는 부인과 자녀가 음성 판정을 받았는데 처제만 함께 양성 판정을 받자 불륜이 아니냐는 음흉한 억측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여성 확진자는 비슷한 시간대에 여러 차례 노래방을 방문한 이력이 공개된 뒤 ‘노래방 도우미’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까지 했다.

 이렇게 동선을 둘러싼 사람들의 조롱과 비방이 이어지고, 개인 정보 침해로 인한 확진자들의 피해가 발생하자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추측을 우려해 자신의 동선을 고의로 숨기는 확진자들도 나타났다. 인천의 한 학원강사는 클럽을 다녀온 뒤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자신의 동선을 숨겼다가 학생과 친구, 학부모,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에게 7차 감염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에 있는 한 구청의 동선조사팀을 취재한 적이 있다. 관내에 확진자가 발생하면 수천 대의 CCTV와 신용카드 전표, 스마트폰 위치 추적 등을 통해 세세한 동선을 파악하고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을 찾아내 검사를 받도록 하는 게 일이었다. 그렇게 추적을 해도 동선이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없는지 묻자 담당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없습니다. 결국엔 나옵니다.”


 확진자가 동선을 숨길 경우, 그걸 찾아내는데 시간이 더 걸릴 뿐, 결국에는 다 파악된다며, 아직까지 못 찾아낸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ksPZ5vpZfU


 지나친 동선 공개로 인한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가 논란이 되면서 ‘코로나 증세’보다 ‘동선 공개’가 더 무섭다는 말까지 나오자 결국 정부가 확진자의 정보 공개 범위를 제한하는 내용의 지침을 내놨다. 불필요한 개인정보 침해를 막기 위해, 공개 정보 가운데 주소지와 직장명 등을 제외한 것이다.

 여전히 동선 공개에 대한 불안감이 존재하지만, 국민의 생명권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공익을 위해 확진자의 동선 공개는 불가피하다는 것에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동선 공개가 무서워서라도 더 조심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방역에 도움을 주는 길이 될 것이다. 답답하고 갑갑한 이 시기가 어쩌면 내 평소 생활을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www.instagram.com/kkh_mbc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에도 환불원정대가 필요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