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뭐하니’가 예능 샛별을 발굴하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해 연말 시상식에서 개인 통산 15번째 연예대상을 수상한 유재석 씨가 수상소감에서 한 말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후배들이 꿈을 꿀 수 있는 조그만 무대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출연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젊은 개그맨들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던 KBS 개그콘서트 마저 문을 닫게 되자, 개그맨 선배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시상식에서 소망을 말한 것 같다. 그러자 무한도전 시절부터 유재석 씨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예리하게 잡아내 대박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온 김태호 PD가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잘 나가는 예능인들에게 잠재력이 있지만 기회가 없어 주목받지 못한 예능인들을 추천받아 스튜디오로 불러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예능 샛별이라고는 하지만 하나같이 10년 이상 무명의 시절을 보내며 여러 무대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단단한 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지상파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하나같이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어렵게 찾아온, 어쩌면 생애에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단 한 번의 기회를 꼭 잡아야 한다는 절실함과 간절함은 출연자들을 바짝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쩌다 한 명이 웃음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다른 출연자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땀을 줄줄 흘리고 연신 물을 들이켰다.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가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짧은 시간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화면 바깥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출처: MBC '놀면뭐하니' 출처: MBC '놀면뭐하니' 거기서 유재석 씨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간파한 그는 그 순간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그리고 그이기에 해줄 수 있는 말을 건넸다.
“절대로 집에 가면서 찝찝한 마음으로 돌아갈 필요 없어요. 내가 오늘 터뜨렸다 못 터뜨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는 이런 상황을 이미 다 예견하고 있었다며, 당연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이 결코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아니고, 앞으로 계속 기회를 줄 것이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말고 편하게 놀다 가라고 얘기했다.
한 출연자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말하자 오히려 크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생각나는 게 없을 때는 솔직하게 없다고 말하는 게 좋은 자세’라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오늘 이게 다가 아니거든요.”
잔뜩 얼어붙어 있던 출연자들은 그의 배려에 점차 긴장을 내려놓았고, 하나둘 자신들의 장점을 드러내며 웃음을 빵빵 터뜨렸다. 초반의 경직됐던 모습을 털어내고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음은 물론이다. 방송을 마칠 즈음 한 출연자가 ‘그동안 채찍만 맞고 살아왔는데, 오늘 처음으로 당근을 먹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에 대한 유재석 씨의 답변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달리는 말에 너무 채찍질을 하면 말도 아파요.”
출처: MBC '놀면뭐하니'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데도, 있는 힘껏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채찍질만 당하는 말의 심정을 누가 알까. 그의 얘기는 호되게 채찍질을 당해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역시 지금 서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짧지 않은 무명 생활을 견디며 인생의 진한 채찍 맛을 보았기에 그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채찍의 경험이 그에게는 이미 너무나 오래 전의 일임에도 그 아픔을 잊지 않고, 지금 채찍 맛을 보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공감 속에서 그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방송을 본 뒤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왜 직장에는 유재석 같은 선배가 잘 없을까.”
어느 직장에나 유재석 씨 정도의 일인자는 아니더라도 잘 나가는 선배들은 다 있다. 그들도 유재석 씨처럼 신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좀처럼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어쩌다 기회를 얻어도 조급함 속에 날려버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주목받지 못하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뒤의 모습은 유재석 씨와는 크게 다른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요즘 애들은 왜 그래?”
이걸 유재석 씨의 화법으로 바꾸면 이렇지 않을까?
“나도 그랬어.”
결국 ‘유재석 같은 선배’란 ‘성찰(省察)할 줄 아는 선배’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알고,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는 선배, 그럼으로써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지금의 후배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선배가 ‘유재석 같은 선배’가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내 선배가 유재석이길 바라지만, 자신은 후배들 앞에서 유재석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직장에 유재석 같은 선배가 없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후배들에게 유재석 같은 선배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후배들에게 유재석 같은 선배가 된다면 우리 회사에도 유재석이 있게 되는 것이니, 오늘부터라도 ‘유재석 연습’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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