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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Mar 26. 2020

어느 바바리맨과의 인터뷰

 내가 처음 바바리맨을 본 건 중학생 때이다. 남자가 바바리맨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바바리맨’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던 나는 그때 처음 바바리맨의 존재를 알게 됐다. 어느 날 쉬는 시간이었다. 교실에 앉아있는데, 복도에서 갑자기 ‘우와!’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아이들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복도로 달려 나갔더니 아이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밖을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웬 성인 남자가 우리 학교를 향해 바지를 반쯤 내리고 서있다가 예상치 못한 남자아이들의 반응에 당황해 도망가고 있었고, 멀리서 그를 좇는 남자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이 바바리맨은 왜 남학생들을 향해 바지를 내리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 학교만의 특별한 사연이 숨어있었다. 우리 학교는 원래 여자중학교였는데, 우리 학년 때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남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몰랐던 바바리맨이 여전히 여학교인 줄 알고 찾아와 하필이면 남학생들의 교실 앞에서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남학생들에게 바바리맨은 그렇게 웃기고 재미있는 존재였다. 환호와 박수로 놀려대며 장난이나 치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그런 존재.


 그런 바바리맨을 다시 만난 건 내가 성인이 되고 한창 기자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사회부에 소속돼, 열심히 내가 담당하고 있는 경찰서들을 돌며 새로 발생한 사건, 사고를 챙기고 있던 어느 날, 강북의 한 경찰서 형사과에 들어갔는데 평소와 다른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수십 명의 여성들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구석에는 한 젊은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한 여성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더니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바바리맨이 붙잡혀 들어왔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피해자들이 피해 진술을 하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했다. 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성이 바로 그 문제의 바바리맨이었다. 취재를 해보니, 20대 후반의 이 남성은 공무원 시험 준비생으로,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의 교수였다.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 두렵지도 않은가?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나? 궁금증이 쏟아졌다. 마침 담당 형사가 피해자들로부터 피해 진술을 받느라 바쁜 틈을 타 바바리맨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내 신분을 밝히자 의외로 쉽게 입을 열었다. 그는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억울하다고 했다. 아, 범행을 부인하는 거구나.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겠지. 대부분의 범죄자들처럼 뻔한 변명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정말 억울해요.”

“뭐가요?”

“저는 30명한테 그랬는데, 경찰이 자꾸 40명한테 그랬다고 그래요.”

“네???”

“저는 30명한테만 그랬다고요! 정말 억울해요!”


 어이가 없었다. 제 입으로 무려 30명에게 그 짓을 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붙잡혀와 앉아있으면서도 그는 눈앞에 있는 피해 여성들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이, 본인의 어처구니없는 억울함만 호소하고 있었다. 


“나머지 열 명은 본인이 저지른 게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죠?”

“그 동네는 제 구역이 아니란 말이에요.”

“구역이요?”

“다 구역이 있어요.”


 바바리맨끼리는 서로 알고 있어서 암묵적으로 담당 구역을 나눠놓고 정보도 교환하고 있으며, 서로의 구역은 침범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런 범죄 행위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말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한테 왜 그러는 건데요?”

“스트레스가 심해서요. 공무원 시험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한 번씩 그렇게 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단지 스트레스 풀이로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죄책감도, 반성의 눈빛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피해자들이 입었을 상처와 고통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씁쓸하다 못해 참담했다.


 취재를 마치고 회사로 들어와 동료들에게 그 날의 씁쓸했던 인터뷰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자 여기자들마다 그동안 각자 바바리맨으로부터 당했던 경험과 그때 느꼈던 공포를 털어놓았다. 한 명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자 또 한 명, 또 한 명....... 누구 하나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놀라웠다. 바바리맨이 그렇게 많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낮에 만났던 바바리맨의 ‘담당 구역’ 얘기가 떠올랐다. 수많은 바바리맨들이 촘촘히 구역까지 나눠서 활동하고 있으니, 어느 여성도 그들에 의한 잠재적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들은 모두 충격적이라는 반응이었다. 바바리맨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일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는 보편적인 위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일상적인 성폭력에 대한 노출과 그로 인한 공포는 남자들이 아무리 기사를 통해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다 해도 여전히 한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최근 채팅방을 통해 미성년을 포함한 수십 명의 여성들을 성 착취한 n번방, 박사방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가 뜨겁다. 이번 사태에 대한 국민적인 반응이 기존의 성범죄 사건들과 다른 점은 여성들에 대한 성착취를 직접 실행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채팅방에 들어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함께 즐겼던 수만, 많게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보통의 남성들에 대한 분노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무지와 피해자에 대한 몰이해가 얼마나 심각하면 이런 참담한 일이 이토록 광범위하게 벌어질 수 있었을까. 그 채팅방에 들어가 있었던 모두가 공범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도록 일상적인 위험을 방치해온 우리 모두가 공범이 아닐지 되묻게 된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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