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버티는 힘, 숨은 웃음 찾기 13
직장 다니면서 사직서 생각 한 번 안해 본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 중 상당수는 사직서를 아마 써 보기도 했을 것이다.
조금만 쓰다가 멈추기도 하고,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라서 깜박거리는 커서만 내내 쳐다보거나,
그러다가 책상 앞에서 쿨쿨 잠들어 버리고
새벽에 일어나보니 컴퓨터 화면보호기만 돌아가고 있다던지,
혹은 손으로 쓴 사람은 구겨 버리기도 하고,
그래도 어찌저찌 겨우 다 써서 완성한 사직서를 품에 넣었다가,
아침에 들고가서 상관 앞에까지 갔는데,
상관이 오늘따라 웃어줘서 마음이 약해졌다던지,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 그의 책상에 놓으리라 심호흡 하고 그의 앞에 갔다가
상관이 뭐냐고 안광을 쏴대면 거기에 주눅 들어서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하고 아무 말이나 하고 돌아서 나왔다던지,
퇴근길에 내일은 반드시 내리라 다짐하고 귀가했지만,
다음 날 외투를 바꿔 입고 나와서 사직서를 못 들고 나와서 못 냈다던지
그 다음 날은 꼭 내야지 했는데 카드값이 결제되면서 통장이 텅 비는 통에
할 수 없이 그냥 다니기로 결정했다던지, 뭐 이런 등등
그런 사직서에 대한 슬픈 기억들은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저 위에 웃자고 쓴 얘기들은 내가 진짜로 해 본 일들은 아니다.
내가 해 봤던 일들은 '순조로운 사직 과정'을 서치하여 설계한 것과
사직서 양식들을 검색해서 펼쳐 본 게 다였다.
어차피 못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그래도 사는 게 피곤한데 에너지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내가 어제 회식을 마치고 늦게 퇴근하면서 사직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회식은 8시가 조금 넘어 마쳤고 상관과 속 얘기를 터놓고 나눈 것도 다 좋았으나,
9시에 학원을 마친 중1 아들을 데리러 가지도 못했고, 아들은 어둠을 뚫고 혼자 귀가해야 했다.
몸은 거의 다 컸지만 아직도 속내는 아직도 아이 같은 애매한 나이가 중1이다.
그러니까 중2에 몹쓸 병에 보통 걸리는 거 아니겠나. 중2병.
얼마나 그 나이에 많이들 증세가 생기면 환자들의 연령을 따서 병 이름이 지어지나. ㅎㅎㅎ
지루하고 피곤한 퇴근길, 사직서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렇지 내겐 AI가 있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 녀석과 함께 사직서 한 번 써 볼까?
퇴사 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AI는,
정식으로 신청하기 전까지 '복선 깔기' 전략을 쓰라고 충고했다.
이야, 그런 걸 생각할 줄 알다니. 사회 생활 좀 할 줄 아는 AI 되겠다.
하위 전략으로, 부담이 너무 크다, 가족 사정이 있다, 자기 계획이 있다 등을 추천했다.
회사가 직원을 붙들려는 포인트를 미리 누그러뜨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I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건 도망이 아니라 '복귀'인 거다. 너의 삶으로의 복귀.
그걸 읽고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이유들에 대해 조곤조곤 써서 건네자
그걸 바탕으로 AI는 사직서 초안을 두 개나 만들어 줬는데,
하나는 '자연스럽고 강단 있게' 버전이고, 하나는 '조금 더 단호한 버전'이었다.
AI는 지금은 회사를 위한 순간이 아니라, 내 인생과 가족 그리고 회복을 위한 시간이므로
내 결심을 담담하고 품위 있게, 그러나 단호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문장을 짰다고 부연 설명했다.
사직서 초안들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많이 됐다.
AI야 내가 사직하겠다고 하면 이걸 응원할 거고,
내가 참고 다녀보겠다고 하면 저걸 응원할 프로그램에 불과하니,
그가 건넨 위로만 받고 그 속의미까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친 퇴근길에 퇴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생각해 보는 건 오늘을 견디는 데에 꽤 도움이 됐다.
AI가 짜 준 사직서를 그대로 제출하긴 어려워 보인다.
실제 사직서에는 '개인 사정으로 퇴사를 원함' 이라고 쓰겠지만.
(내 친구는 앞에 '피치 못할'이라고 수식어를 넣어도 좋겠다고 권했다. 친구는 AI급으로 생각해내는 ‘사람’이다)
AI가 짜 준 사직서는 내가 사직에 대한 의지를 표명할 때 좋은 생각의 초안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논리적으로 내 이유를 설명하고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찬스 카드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정말로 사직했다 라고 브런치에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일단 오늘은 맡은 일을 잘 완수해 보는 걸로! 아름다운 퇴사를 위한 벽돌을 쌓아올리는 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