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모른다
열린 책들에서 펴낸 도스또예프스끼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의 장편소설인 『상처받은 사람들 원제 Polnoe sobranie sochinenii v tridtsati tomakh』 표지에는 노르웨이 미술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병실에서의 죽음 (Der Tod in Der Krankenstube)>(1895)이 사용되었다. 다만 그림의 색감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이 책 이외에도 열린책들에서 펴낸 도스또예스프스끼 소설의 표지로 노르웨이 미술가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흥미롭게도 뭉크가 죽기전에 가지고 있던 책이 도스또예프스키의 『악령』이라고 한다.
좌측 『상처받은 사람들 원제 Polnoe sobranie sochinenii v tridtsati tomakh』 표지
우측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병실에서의 죽음(Death in the Sickroom)>, 1895년경, 캔버스에 유채, 150 cm × 168 cm, 국립미술관 Nasjonalgalleriet, 오슬로 Oslo
작품을 그린 에드바르 뭉크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미술가이다. 노르웨이에서는 국민적인 화가이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노르웨이 출신 미술가이다. 뭉크의 초상은 지폐에도 그려져 있다.
뭉크가 그린 그림들은 주로 생과 죽음, 불안한 인간의 감정 등을 다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 바로 <절규(The Scream)>이기도 하다. 원래 뭉크가 이 작품에 붙인 이름은 <Der Schrei der Natur>(자연의 절규)이나 흔히 <절규 The Scream>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연작으로 5점 정도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화 작품은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절규>에서는 붉은 하늘을 바탕으로 공포스러우면서도 두려우면서도 괴로워하여 소리지르는 듯 보이는 인물을 묘사하였다. 배경의 구불구불한 선이 불안함을 보여주는 듯 해보이며 인물의 얼굴도 해골과 같이 그려져 있다.
1895년경에 그려진 <병실에서의 죽음 (Der Tod in Der Krankenstube)>에서도 정면을 마주본 여인의 얼굴은 마치 해골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죽음으로 인한 절망, 아픔이 엿보인다. 특히 그림 가장 앞에 있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 소녀의 모습에서 슬픔과 애도가 가장 극대화되어 있다. 어린 나이에 경험하는 죽음은 더 가혹할 것이다.
1893년에 그려졌으며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이 한 점 더 있다. 그래서 <병실에서의 죽음>은 두 점이 이다. 둘 다 오슬로에 있으며 하나는 뭉크 미술관 (Munch Museum)에, 다른 하나는 오슬로 국립미술관 (Nasjonal galleriet)에 소장되어 있다. 얼핏봐서는 닮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그림은 조금 차이가 있다.
좌측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병실에서의 죽음(Death in the Sickroom)>,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34 cm × 160 cm, 뭉크 미술관Munch Museum, 오슬로Oslo
우측, 위의 그림,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병실에서의 죽음(Death in the Sickroom)>,
<병실에서의 죽음>은 도스또예스프스끼 장편소설 『상처받은 사람들』 의 내용과도 잘 맞는 듯해보인다. 1861년에 쓰인 이 책은 도스또예스프스끼가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 쓴 두 번째 소설로 자존심 강한 아버지와 방탕한 딸이라는 두 인물의 대비가 주축이 된다.
책과 그림은 둘 다 비극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병실에서의 죽음>이 조금 더 죽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인물들의 표정에서 우울함과 불안과 절망이 더 드러난다. 이는 뭉크가 일생동안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뭉크는 병약했다. 그는 5살에 어머리를 결핵으로 잃었다. 10년이 지난 후 그는 어머니 역할을 해주던 한 살 위의 누나를 다시 폐결핵으로 잃었다. 이후에는 그의 동생들마저 병을 앓았다. 뭉크도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뭉크는 죽음으로 인한 불안에 늘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뭉크의 작품들에서 지속된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절규>에서와 같은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병실에서의 죽음>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죽음이다. 이 두가지가 동시에 나타난 그림이 <죽은 어머니와 아이(Dead Mother and Child)>일 것이다. 죽음을 회피하려는 듯 귀를 막은 아이는 뭉크 자신일 수도 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죽은 어머니와 아이(Dead Mother and Child)>,
1897-99년, 캔버스에 유채, 105 × 178.5 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죽음이라는 종결점 앞에서는 그 어떤 것들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아닐까. 아마도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도, 죽음으로 인한 충격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상처받은 사람들 원제 Polnoe sobranie sochinenii v tridtsati toma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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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병실에서의 죽음(Death in the Sickroom)>,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34 cm × 160 cm, 뭉크 미술관Munch Museum, 오슬로Oslo
https://www.edvardmunch.org/death-in-the-sickroom.jsp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병실에서의 죽음(Death in the Sickroom)>, 1895년경, 캔버스에 유채, 150 cm × 168 cm, 국립미술관 Nasjonalgalleriet, 오슬로 Oslo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죽은 어머니와 아이(Dead Mother and Child)>,
1897-99년, 캔버스에 유채, 105 × 178.5 cm, 뭉크 미술관, 오슬로
https://nl.wikipedia.org/wiki/De_dode_moeder_en_het_k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