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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n 16. 2019

#13 당신은 모른다, 빈 공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늘 그렇듯이, 당신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약속은 연기되었다.

기대했던 약속이 늦어지면서 나는 또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이 보기에 나는, 늘 웃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내가 당신 앞에서 그렇게 웃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했는지를, 아마 당신은 모를 것 같다.     


John William Godward, Under the Blossom that Hangs on the Bough, 1917, Private collection



그때 생각했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내가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음에도 당신과 나의 약속은 연기되었다.

그 중요한 이야기는, 적어도 그 연락을 하려던 그 순간에는, 당신과 나의 마지막을 의미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당신과의 약속을 잡으며 내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 것은, 당신을 힘들게 했던 당신의 그 빈 공간을 이야기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날 당신이 내게 보일 태도에 따라, 내가 마지막을 말하게 될지, 말하지 않게 될지가 결정될 예정이었다.      


당신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피치 못할 사정을 며칠 전에는 내게 이야기할 생각은 못했던 걸까.

평소의 나와는 달랐다. 평소 같으면 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에도 마지막까지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과 만나며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건 당신이 내게 보인 그토록 불성실하며 사려 깊지 못한 태도 탓이었다.

당신과의 약속은 더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렇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견디는 게 힘들었다. 그날 만날 당신의 태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일 때, 포기할 때가 가까웠을 때, 그때가 어떤 전환점이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적어도 당신과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어야 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어야 했다.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당신을 네 번이나 만나고 다섯 번째에 정리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내게 그 빈 공간을 말할 날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게도 있었던 그 빈 공간 때문이었기도 했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 내가 만나는 상대에게, 그들이 가진 빈 공간에 대해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그 공간은 비록 지나간 과거이기는 하지만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당사자에게 힘든 기억이나 사건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상대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기다려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다만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는 정해둔 시점이 있었다.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상대가 나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상대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 빈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사전트John Singer Sargent의 그림 속 여인처럼 지쳤다. 무기력해졌고 회의감만이 남았다. 그 일들은 내게 결국 빈 공간으로 아프게 남았다.

내게 본인의 빈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은 당사자들에게는 그들의 빈 공간이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빈 공간을 내게 이야기하지 않음으로 나 역시 아팠다.     



John Singer Sargent, Nonchaloir, 1911,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나는 당신의 빈 공간이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만나는 당신의 빈 공간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빈 공간에 대하여, 소개해주신 분이 알고 있든지, 내 부모님이 알든지,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빈 공간이 어떻든, 20대에 낳은 아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내게는, 당신이 직접 그 빈 공간을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당신과 나는 겨우 네 번을 만났다. 빈 공간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신과 내가 만나게 될수록 양가의 부모님은 점점 기대가 커졌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흔을 앞둔 남녀가, 어찌 되었든,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님들이 결혼을 기대할 만했다. 그런데 그 결혼에는 당신과 내가 없었다. 마치 양가 부모님들이 결혼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결혼식장에 당신과 나 대신 양가 부모님이 입장하는 것처럼.  

        

아무리 맞선이라도 당사자 없이 결혼을 진행할 수는 없다. 맞선이라고 그 어떤 것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당신을 계속 만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때 당신은 내게 먼저 그 빈 공간을 이야기를 해줄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당신은 그때까지 나를 늘 기다리게만 했다. 나는 또 기다리다 또 지치기는 싫었다. 그렇게 기다리기에는 내 시간들이, 내 삶이, 너무나 아깝게 생각되었다.     





Edward Hopper, Sun in an Empty Room, 1963, Private collection

     

당신에게는 늘 당신의 빈 공간만이, 상처만이, 최우선이었다.

당신만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받은 듯 했다.

나는 당신과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런 내가 당신의 그 빈 공간을, 상처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힘들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힘들고 아픈 시간을 잘 견딘 당신이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기도 했다. 나라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 같기에.     


당신은 몰랐겠지만 누구에게나 그 빈 공간은 있다.

당신보다 덜 아프고 덜 무겁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신이 그 누군가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지 않나.

당신에게, 다른 누군가의 공간은 호퍼Edward Hopper그림처럼 빛이라도 있게, 그렇게 가볍고 쉽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빈 공간만이 그토록 무거웠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빈 공간을 가진 당사자에게 그 공간은 더없이 무겁고 아프다. 당신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다들 그 빈 공간의 무게를 견디며, 다른 사람의,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빈 공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게도 그 빈 공간이 있었다.

내게는, 공간이 당신의 공간보다 훨씬 무겁고 훨씬 아팠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당신을 만나며 감당해야 할 빈 공간은 그 하나가 아니었다.     

당신의 빈 공간이 더해진 탓에, 내가 감당해야할 빈 공간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당신과 만나기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그 빈 공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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