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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n 16. 2019

#12 기대하게 되었다, 기다림 끝에서




당신에게 연락을 했다. 뜬금없이.
주말에 차를 한잔 하자고 했다. 혹시 당신이 거절할까봐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꼭 만나자고 했다. 

급작스러운 약속이었다. 의외로 당신은 흔쾌히 좋다고 했다. 예상 밖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생겼다.

처음부터, 정확히는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나는 당신에게 기대가 없었다. 그리고 당신과 만난 시간들은 그 없던 기대마저 사라지게 했다. 그럴 만 했다.  
덕분에 나는 점점, 예상치 못한 메세지, 전화, 이런 사소한 것들에 설렜다.


Marcus Stone, Her First Love Letter, 1889, Auckland Art Gallery


메세지, 전화 이런 것들은, 연인 사이에 당연하게 여겨질 것들이었다. 그런데 당신과 만나며, 그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 나를 설레게했다. 내게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도 사소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연인에게서 애정 어린 메세지를 받은 그림 속 여인처럼, 내게는 그 사소한 모든 것들이 특별했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두고 더 욕심을 내고 더 기대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기대하기가 두려웠다. 정확히는 기대 후에 오는 실망이 무서웠다.

일시적 당신이든, 잠깐씩 당신이든, 10년의 당신이든, 기대할 때마다 실망도 컸다. 그래서 나는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마흔을 앞둔 내가, 결혼하려고 했던 남자가 없었을 리가 없었다. 몇 번이 있었다. 그들 모두 당신처럼 적당했다. 10년간의 당신을 제외하고는. 나는 매번 그들이 내게 보인 그 순간의 진심을 믿었다. 그러나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실망했다. 어느 것에도 진심은 없었다. 

그럼에도, 결혼을 하려고 했던, 그 잠깐씩의 당신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내 생각보다는 힘들었다. 결코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그 실망감을 견디는 것이 쉬워지지도 않았다. 나이가 드는 만큼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도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구나 싶은 그런 허탈함도 있었다.

 

매번 그렇게 쉽게 기대하고마는 내 스스로에게도 실망했다. 인간이란 이렇게 잘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나마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10여년간 돌아갈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당신은, 나를 기대하게 한 적은 없었다. 그때는 오히려 당신이 내게 기대했으면 했다. 어쩌면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내게 기대해주었으면 했기에, 그 10여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는 기대와 실망으로 채워졌던 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기대와 실망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에 설레는 편이 더 행복했다. 덕분에 나는 행복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과거는 내게도 이렇게 큰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이런 시간을 지나, 일시적이지만 당신을 만났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기대가 없었고 점점 더 사라졌다.
그런데 내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신이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나는 사실, 당신과 차를 마시며, 당신과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당신은 내게 그다지 확신이 있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더이상 소모할 수 없었기도 했다. 
나는 당신을 만난 이후 너무 지친 상태였다. 내가 큰 기대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연인같은 관계를 원했을 뿐인데, 그 어떤 것도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지치기도, 더 상처받기도 싫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당신의 과거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당신의 과거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스스로 늘 모든 것을 당신의 과거와 비교할 것 같았다. 질투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신은 내가 뜬금없이 당신과 약속을 잡기 전까지, 나를 그렇게 기다리게 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싫었다. 기다리는 시간 속에 기대는 거의 없었고 불안만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며 당신에게 맞춰주는 내 모습조차도 싫어졌다. 그 시간은 내게 지옥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놓기로, 마음의 정리를 하고 연락을 했었다.


Brassai, Photograph 3, Paris de nuit, 1932, Nationale Bibliotheek van Nederland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그런 내게, 그런 마음을 가진 내게, 당신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내게, 함께 이야기를 하자고, 고민은 나누면 된다고 하던 당신의 그 말은, 나를 기대하게 했다. 당신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따뜻했다.


내가 지난 시간 당신을 만나며 바란 것은 그토록 따뜻한 말 한마디였었다. 나는 그 말을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던 그때에 가서야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의 그 말은, 깜깜한 밤이지만 희미하게나마 빛이 있을 것 같은, 그런 희망을 갖게 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당신과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조금은 뜨거워질지도 모른다고, 그런 헛된 기대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나를 그렇게 기대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토록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기대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지만,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 속 여인처럼, 그렇게 또 당신을 기다리게 기대하게 되었다. 


Caspar David Friedrich, Woman at a Window, 1822, Alte Nationalgalerie,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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