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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n 15. 2019

#11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와 달랐다.

지난 세 번의 만남 동안 당신은 내게 그 빈 공간을 말할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날 밤, 당신은 그 이야기를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산에 정신이 팔린 나는 그 빈 공간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덕분에 당신과 나는 마치 어제도 만난 연인들처럼 별것 없는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또 다음에 만나기로, 그러니까 다섯 번째로 만나기로 했다.


      

늘 그렇듯이 주말 동안 당신과 나는 서로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내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착잡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시에 내 마음은 폴록Jackson Pollock의 그림 보다도 훨씬 복잡했었다. 엉망이었기도 했다.


Jackson Pollock, Yellow Islands, 1952, Tate, London



그날 나는 당신의 그 지독한 담배 냄새와 어두운 안색을, 나에 대한 고민으로 오해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당신은 내게 호감이 있다. 심지어 결혼할 생각도 있다. 

만나면 더없이 잘해준다. 그런데 만날 약속을 제외하고는 연락이 없다. 

장거리 연애도 아닌데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 이건 자주 보는 경우다. 당신과 나는 한 달에 한 번 봤다. 이런 식으로 만나다가는 열 번 보면 열 달이 지난다. 그렇게 하면 열두 번을 만나면 일 년이 지난다.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과 사계절을 만나보는 것은 좋다. 다만 적당하게 미지근한 상태로 사계절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열두 달을 만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당신은 분명히 적당했다. 그러나 내가 당신과 만나며 만난 그 상황은 적당하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당신이 내게 했던 질문들이 생각났다.     


당신이 했던 질문들이란 이런 류의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음식을 먹으러 갔을 때, 양이 중요한가 맛이 중요한가.

당연히 맛이다. 물론 가격 대비 맛을 말하는 것이다.

비싸게 돈과 시간을 들여 음식을 사 먹는데 맛이 없고 양만 많으면 기분이 상한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맛도 중요하고 양도 중요하다.

또 예를 들면, 물건을 고를 때, 실용성이 우선인가 디자인이 우선인가.

이 답은 어떤 물건을 고르냐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대개 나는 디자인을 선택한다.

그리고 요즘 나오는 물건들 중에 실용성과 디자인, 이 둘 다를 만족시키지 않는 물건을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때 나는 이 질문들을, 내 취향이 본인과 같은지 다른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테스트로 여겼다.

그래서 그때 나도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건지를.

늘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건지를.

다시 말하지만 요즘 나오는 물건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이다. 매일 쓰는 핸드폰만 해도 그렇다. 다만 아름다움은 각 개인의 취향 문제일 뿐이다.    



Edouard Bisson, Question to the Cards, 1889,  Private collection


나는 고민되게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고민되는 상황은 복잡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마치 그림처럼 점성술사가 답을 골라주는 것처럼 그렇게, 답은 명료했으며 명확했다. 

나에게는 사람도, 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자A와 남자B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거나, 회사A와 회사B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나는 어떤 쪽을 선택하든 후회할 게 뻔하다. 그렇다면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랬다.  

내가 고민한다는 것, 그리고 선택에 대해 후회가 남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둘 다 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고민은 어떤 상황에도 답이 될 수 없었다. 고민은 그만큼 확신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선택하지 않는 것이 답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내게 했던 질문들은 어느 것 하나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당신에게 적당하게 맞추어 대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질문을 하든, 내 답은 적당히, 당신의 취향을 고려한 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당신의 질문도, 내 답도, 의미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알고 있다. 그 질문들이 그토록 내게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이유를.

당신이 했던 질문들과 그 답은 당신 앞의 나를 향해있지 않았다.

당신이 했던 질문들도, 그 답도, 당신의 과거와 이어져 있었다.

나는 늘 당신 앞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늘 당신의 그 과거와 겹쳐져 있었다.

당신 앞에 누가 있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내게 했던, 둘 중의 하나만을 골라야했던 그 질문들은, 당신의 상황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그때, 당신 앞의 나와, 그 과거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나는 당신이 하던 고민의 답이 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당신의 답은 그 과거였는지도 모르겠다.




Tihamer Margitay, Jealousy, 1892, Hungarian National Gallery




결국 나는 주말이 지나서 당신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이제 나는 당신의 과거를 마주할 차례였다, 드디어.

당신을 내 앞에 오게 한, 그리고 적당히 머무르게 한, 

그리고 나를, 질투에 눈 멀게 했던, 초라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과거를,

나는 점점 더 과거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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