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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n 30. 2019

#27 “혹시... AB형이세요?”

건어물녀가 맞선녀가 되면서 듣게 된 말



서른 즈음이었다. 친구가 내게 <호타루의 빛>이라는 드라마를 보고는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드라마를 꼭 보라고 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딱 나라는 것이다. 드라마를 찾아보니 딱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게 나였다. 친구는 내가 대표적인 건어물녀라고 했다. 건어물녀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건어물녀(위키백과, 네이버 국어사전)

건어물녀는 일본 만화 <호타루의 빛>에서 유래한 일본의 신조어이다. 즉 건어물녀는 <호타루의 빛>에서 여주인공의 생활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주인공 아메미야 호타루는 직장에서는 유능하고 세련된 여성이다.

2. 그러나 호타루는 퇴근하여 집에 오면 운동복을 걸쳐 입고 건어물을 씹으며 일상을 편하게 보낸다.

3. 또한 호타루는 연애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실제로 나는 평일과 주말에 차이가 매우 크다.     


나는 호타루처럼, 유능하고 세련된 편은 아니다, 아직은. 그러나, 전투복, 즉 일할 때 입는 옷은 매우 신경을 써서 차려입는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이 주말에 내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나중에는 다들 알게 되기는 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일할 때와 집에 있을 때의 차이가 매우 크다.

나는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 정도는 아니었다.     


집에서의 내 모습은 학교 때 친구들, 가족들, 12년을 함께한 당신 정도가 알고 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호타루의 빛>을 보며 나를 보는 듯했다고 했다.

친구들은, 남들 다 연애할 때, 내가 연애에 관심이 없던 것을 알았다. 내가 한눈에 반한 당신 때문에 확신과 의심 사이에 있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친구들 중 몇은 내가 결혼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을 했다. 물론 지금도 하고 있다. 심지어 아기를 키우면서도 내 걱정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쓰고 보니, 내가 새삼 친구복이 많다 싶다.)     


그런 내가 부모님의 압력에 못 이겨, 그리고 효도하는 마음으로, 종종 선을 보자, 친구들은 안심했다.

그러면서도 다들 걱정했다. 선을 보러 갈 때 혹시나 내가 집에 있을 때의 지나치게 편안한 모습으로 나갈까 말이다. 그리고 꼭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했다. 너는 외모만 여자라고 하면서. 다행히도 부모님을 생각해서 원피스로 된 맞선용 전투복을 착장 했다.          



혹시 A형이세요? 건어물녀가 초보 맞선녀가 되자 A형이 되었다.

     

맞선이 쉽지는 않았다. 보통 부모님이나 친척분들, 지인분들이 소개해주신 자리였다.

당시에 결혼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남들 하니까 나도 해야지 하는 정도인 그런 마음 상태에 가까웠다. 서른까지만 해도 조급한 마음보다, 왠지 나 스스로는 결혼을 하기에 이르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아셨으면 기절하실 일이다.     

맞선 자리에서 나는 소극적이다 못해 매우 방어적이었다. 심지어 예전에 만난 남자 친구조차도, 내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방어막이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다들 내게 혹시 A형이냐고 물었다.

내가 내 혈액형을 말하면 맞선남들은 전혀 예상 밖이라며 놀라고는 했다.

역시 혈액형은 잘 맞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맞선남들은, 내게,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여성스러운 이미지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행히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내 자존감을 지켜줄 정도의 애프터는 들어왔다.     


맞선 후기를 들었던 내 친구들은 내게 평소대로 좀 편하게 하라고 했다. 언제는 편하게 하지 말라더니...          



혹시 AB형이세요? 30대 초반이 지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AB형이 되었다.

     

아마도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맞선 자체에 기대가 없어졌던 것 같다. 아마 나를 만났던 맞선남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나 나나, 혹시나 하는 아주 작은 기대가 완전히 없었다고는 못할 것 같다.

     

맞선은 내가 10여 년을 함께한 당신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종종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했다. 맞선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적도 있고 맞선 때문에 헤어진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분기별로 보는 적당한 맞선 덕분에 나는 부모님께 적당히 효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부모님의 잔소리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 이 부분은 나를 포함한 모든 맞선녀, 맞선남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일 것이다.     


서른 중반에 이르러서 나는, 사회생활의 결과, 언제나 잘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우 같지는 않았으나 좀 능글맞아진 구석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맞선 자리가 예전보다는 훨씬 편안해졌다. 맞선남들과 왜 부모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토론할 정도였다.     


그때부터 나는 A형이냐는 질문 대신, 혹시 “AB형이세요?”라는 질문을 들었다.

맞선남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인즉, 사진으로 본 내 외모와 본인들이 생각한 이미지와, 실제의 내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들 덧붙이는 말이 “특이하다는 말 자주 들이시죠?”였다.


그러니까 “혹시 AB형이세요”라는 이 질문은 그들 나름대로 나를 배려한 질문이었다.

보통 AB형을 두고 천재 아니면 돌I라고 하지 않나?!... 맞선남들이 내게 혈액형을 물을 때 그들은 나를 천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이상하고 특이한 여자로 확신하고 있었다.





좌 Claude Monet, Water Lilies, ca. 1915-1926.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우 Damien Hirst, For the Love of God, 2007, White Cube Gallery, London



AB형이냐고 묻는 질문은 내게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당신은 모네 Claude Monet의 그림을 좋아할 줄 알았다. 당신은 그런 이미지로 보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신은 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을 좋아할 것 같은, 좀 특이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굳이 내 취향을 묻는다면, "둘 다 좋은데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하나?"라고 다시 묻고 싶다. 쓰고 보니 이래서 AB형이냐고 묻는 것 같다...)


     

처음에 이 질문을 들었을 때는 꽤 충격적이었다.

“아니 내가 왜? 어디가? 옷도 이렇게 세상 무난하게 검은색 원피스인데?”     


나는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해?”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게, “아냐 너 특이하지 않아”라고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웃으며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맞선 자리에서 AB형이냐는 질문을 들었다고 했다. 다들 더 웃었다.

다행히도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도 있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은 본인이 이상하냐고 안 물어.”

위로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가족들에게도 누가 나더러 AB형 같다고 한다고 했다. 가족들에게는 차마 맞선 자리에서 이 질문을 들었다고 못 했다. 친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했다. 그러자 가족들이, 그 선배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말했다... 그랬다. 나는 몰랐다. 나는 이토록 특이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30대에 들어서 나는 내 본모습을 찾은 것 같다.

맞선 자리에서도 아마 나를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건어물녀와 같으며 다소 특이한 내 본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던 것 같다.

반전이 있다면, 에이비형이 되자 애프터 확률이 더 높아졌다. 그런데 거의 안 만났다. 이유는 모르겠다.           

내 특이함을 창조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끓어오르는 창조력을 감당하지 못하여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혹시 글을 읽으신 분들 중 AB형이신 분들이 있어 기분이 상하셨을까 죄송한 마음을 남깁니다. 저는 혈액형별 성격을 믿지 않습니다.


#참고로 제 혈액형은 AB형도, A형도 아닙니다. 남은 것은 두 개, B형 아니면, O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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