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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l 02. 2019

#28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순간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마는 글쓰기



올해 상반기에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일이다.

브런치에 연재 중인 작품은 두 개다. 

첫 번째는 <너는 내 아픔을 모른다>인데 연재가 중단된 상태이다. 의욕은 앞섰으나 쉽지 않았다. 

두 번째는 <함께 걸을 수 있을까>이고 거의 한 달간 매일 쓰고 있다. 매일 쓰는 일은 어려웠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담겼기 때문이다.   

  

둘 다 미술을 이야기하지만 글쓰기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너는 내 아픔을 모른다>는 아픔을 담은 미술을 먼저 고르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갔다. 

두 번째 <함께 걸을 수 있을까>는 이야기를 쓰면서 그림이나 사진을 찾아 넣었다. 두 번째 작품을 작업하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에 떠오르는 그림이나 사진을 찾는데 생각보다 딱 맞지는 않았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내가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슬픔과 아픔이었다.

내 상처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반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첫 번째 <너는 내 아픔을 모른다>를 쓰며 아픔을 담은 미술을 이야기했을 때, 말 그대로 '너는 내 아픔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다들 너무 쉽게 '이해한다'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너무 쉽게 “이해해”라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해한다'는 말이 그만큼 상대를 배려하며 상대에게 호의가 있음을 드러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상대의 삶을 산 적이 없다. 한 사람의 아픔을 그 스스로 이외에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이해한다는 그 말이 너무 피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떤 아픔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닌데 아들을 잃은 마리아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글을 쓰면서 점점 더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픔이 글을 쓴 동기였으나 귀를 자른 고흐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 지난 몇 개월간, 쉽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자만했다. 나는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새삼 다시 깨닫는다.      


    

두 번째 <함께 걸을 수 있을까>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지난 12년간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때 느낌은 마치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지난 12년간 늘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과 함께일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감정에 솔직했다. 가면을 벗어 든 리피 Lorenzo Lippi의 그림 속 여인처럼, 나를 감추고 싶어 늘 가면을 준비했지만, 가면을 쓸 수 없게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나는 늘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내 마음을 감추려고 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감정에 솔직한 탓에 나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늘, 내 감정을, 그리고 나를, 감추려고 노력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무언가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 무언가를 향한 강한 욕망?, 누군가에 대한 질투와 시기,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같은 것들 등등.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다고 믿었다. 늘 웃음으로 모든 것을 무마했다. 


그런데 당신 옆의 나는 그런 감정까지도 드러내고 말았다. 말 그대로 밑바닥까지 다 드러낸 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열렬히 원했고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짝사랑이었으니 더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이후에도 계속 다른 모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일 때 나일 수 있었다. 당신 옆의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매번 쉽게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아무 말 없이 받아준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게 사랑일 수 있겠다 싶었다. 당신과 나의 관계가 지속된 건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당신 덕분에 함께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쓴 글에 오랜 시간을 함께한 당신보다는, 일시적인 당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럴 만했다. 무엇보다, 그 일시적 당신을 만났기에, 당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걱정과 우려도 크다.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당신도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함께 걸을까가 아닌 "함께 걸을 수 있을까"라는 제목이 되었다.           



좌 Lorenzo Lippi, Allegoria della Simulazione, 1640, Angers, Musee des Beaux-Arts.

우 Vilhelm Hammershoi, Woman, Writing at a High Desk, Private Collection     




무엇보다도 <함께 걸을 수 있을까>라는 글을 쓴 덕분에 나는 내가 언제 가장 나다울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바로 지난 글을 써온 그 순간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앞으로 글을 쓸 순간들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순간인 것 같다.


어쩌면 글은 그런 것 같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 담은 내 감정들이, 나도 모르게, 드러나고 마는 그런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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