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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Dec 17. 2021

온전한 나이고 싶은데 온통 너로 만드는,


두서없이 쓴 편지같은 글에 주신 반응이 좋아서 두번째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첫글을 올린 이후 이리저리 끄적여보았으나 다음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게재할 수 없는 글들이었습니다.



첫글은 온전히 저였습니다. 갈 곳은 정해져있으나 가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멈춘 그런 나였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가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나였습니다. 죽음을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절박함으로 또 다시 살기위해 글을 써야했습니다. 그 글에 공감해주신 분들 또한 또다른 나였을 것 같습니다.


첫글은 짧은 시간에 쉽게 써내려간 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글을 쓰기까지의 지난 시간을 생각한다면 짧지 않았습니다. 1년 반 정도가 되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시간동안 꾹꾹 눌러담은 감정을 비로소 글로 쓸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글은 여러 편이었습니다. 첫글보다 나은 글을 보이고 싶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일주일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 쓰다만 글들만 늘어갔습니다. 이리쓰다말고 저리쓰다 던져놓고 한 탓이었습니다. 그렇게 첫글의 부담감은 점점 커졌고 다시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글을 게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가 어려웠던 이유는

온전한 내가 아닌 온통 너였기 때문입니다.


내 발걸음을 멈춰세워서 내가 그 글을 쓰게한 사람, 그게 바로 너였습니다. 너는 당신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당신으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라고 존대하고 싶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너이기 때문입니다.


온통 너, 정확하게는 너에 대한 뒷담화였습니다.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특별하다고 믿는 너,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정체성을 버리라는 말을 하는 그런 너말입니다.

내가 어느날 갑자기 일을 그만둔다면 그 이유 중의 하나일 너였습니다. 업무상 요청을  하면서도 본인만 생각하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 본인은 배려라고 생각하지만 남을 너무나 불편하게 하는 너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dgar Degas, Dancer with a Bouquet Bowing, 1878, 개인 소장



세상의 중심은 너라는 그 믿음 속에 사는 너.

너에게는, 너만이 드가의 그림 속 부케를 든 발레리나가 될 수 있다는 그런 굳건한 믿음이 있습니다.

새삼 이렇게 보니 드가의 그림 속 주인공이 너로 보여 너무 얄밉습니다. 무대 한 가운데에서 조명을 받으며 화사하게 웃는 주인공이, 그리고 그 웃음이 왠지 모르게 미워집니다. 아마 한동안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지금 이 글을 쓸 때의 감정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내게 그림은 늘 위로였는데, 너는 이렇게 그림 앞에 선 나를 온갖 미움으로 채웁니다. 그림 앞에 서있는 나는 꽃을 든 발레리나 옆의 들러리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나는 그림 속 주인공을 질투한 못난이가 됩니다. 어느샌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주연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까지 들고맙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혹시 내가 그림 속 주인공인가 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너 역시도 이 글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을 읽을 너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너는 특별해, 그런데 너만 특별한 건 아냐. 우리 다 특별해.

그런데 이렇게 쓰고보니 내게 이런 글을 쓰게한 너는 꽤나 특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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