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의 역설
‘밥’은 삶의 대명사요, 힘의 원천이다.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는 ‘밥이야 굶을까’라는 말로 마음을 다잡고 ‘밥심’으로 일어선다. 특히나 나이가 들면 ‘밥심’이 더욱 중요해진다. 체력이 이전만하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경쟁에 떠밀려 한껏 힘을 쓰고 난 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밥을 찾는다, 나이들면 밥심이라는 구호인지 최면인지를 읊조리며.
엄마에게도 밥은 삶의 원천이요 존재 의미였다. 평생 가족들 이외 객식구 밥까지 챙겼던 엄마는 20년 가까이 매일 열명 이상의 밥상을 차렸고 20개가 넘는 도시락을 쌌다. 우리집엔 매일 친척이 찾아왔고 집 근처엔 항상 자취하는 외사촌, 사촌, 이종사촌이 있었다. 객식구들 챙기는 것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생각했던 엄마지만 때로 지치고 힘들 때면 우리에게 짜증을 냈다. 어릴때는 그런 엄마의 짜증이 부당하다고 생각돼 대들곤 했는데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엄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중노동을 한 셈이었다. 가끔 옛 생각을 하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밥을 해댔는지 모르겠다며 스스로도 진저리를 내지만 엄마는 여전히 누가 집에 오면 밥부터 차릴 생각을 한다.
그런 엄마가 얼마전 이제 밥하기가 너무 싫다고 했다. 아빠는 삼시세끼를 꼭 집에서 먹는다고, 다른 집은 한끼는 외식을 하기로 규칙을 정했다는데 아빠는 그런 것도 없다고, 전화로 투덜대셨다. 오죽 힘들면 저런 말씀을 하실까 싶으면서도 자식들 모두 타지에 사니 딱히 해결 방법도 없다. 그저 엄마 말을 듣고 집에서 간단하게 해 드실 수 있는 반찬이나 조리식품을 배달하는 것 밖에. 아빠에게도 엄마랑 나가서 바람 쐬고 막국수라도 드시고 오라 해도 아빠는 괜히 왜 돈을 쓰냐고 하신다. 평생 앉아서 밥상을 받는 분이 그 고단함을 짐작이나 할까.
“너무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본다”
“뭘 처음 먹어, 이전에도 먹었는데”
“옛날에 먹었겠지, 기억도 안 나. 아빠도 잘 드셔. 다 먹었어”
일요일 저녁 집에 피자를 배달시켰더니 피자를 다 드시고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그런데 이 만원 넘던데 다음부터는 시키라고 하면 시켜, 괜히 돈 쓰지 말고. 집에 밥도 있는데”
결국 돈 얘기를 하시는 엄마한테 걱정하지 말고 밥하기 싫을 때는 언제든지 말씀하시라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피자가 무엇이 그리 맛났을까. 유명 한우집이나 호텔 뷔페도 다 드셔 보신 분이, 아니 이전에도 같이 몇 번 먹었던 그 피자가 어찌 '세상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것'이 되었을까. '남이 만들어준 음식은 다 맛있다'며 밥하기의 괴로움을 토로하던 선배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동안 전혀 관심도 없던 배달앱을 깔았다.
내년이면 여든인 엄마. 결혼하고 60년간 밥을 차렸으니 차린 밥상을 단순하게 계산해도 65,700개다. 차린 밥상이 그 만큼이니 차린 밥그릇은 또 얼마나 될까. 그 많은 밥상을 차리고 치우길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밥이 최고고, 따뜻한 밥 한끼 대접을 도리라고 믿는 엄마. 그 최고가, 인간의 도리가 나이들어 작고 힘없는 엄마의 노동을 여전히 요구한다. 도대체 밥은 무엇인가. 배달앱이 엄마의 한끼의 고단을 거두어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