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 를 보고
영화 <조커>는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으로 도시에 쓰레기가 넘치고 슈퍼쥐가 들끓는다는 뉴스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도시 번화가와 뒷골목의 대조.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엔 햇빛이 밝게 비추고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지만 어두운 뒷골목엔 쓰레기와 오수가 넘쳐 화면만으로도 그 곳이 얼마나 더럽고 악취가 진동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런 도시의 대조는 아서 플렉의 집, 직장과 토마스 웨인의 대저택, 자선행사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아서 플렉은 빈민가 어둡고 좁은 아파트에 살며, 여러 명의 광대들이 분장실 겸 탈의실로 쓰는 허름한 사무실(사무실이라고 하기엔 그냥 낡은 창고 같은 곳)에서 동료들과 생활한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사회복지사의 상담을 받는다. 그의 주요 활동 공간은 모두 어둡고 낡았다. 채광이 비치지 않으며 실내등조차 겨우 어둠을 희미하게 하는 정도. 토마스 웨인의 대저택엔 아서 플렉이 사는 아파트 몇 채는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넓은 부지에 호화로운 정자, 잘 가꿔진 나무와 잔디, 그리고 웅장한 석조 저택이 있다. 자선 파티 행사장은 오페라극장 같은, 상류층의 문화공간이라 짐작되는 곳으로 그 곳의 화장실은 아서 플렉의 주거지보다 밝고 깨끗하다. 도시의 쓰레기와 슈퍼쥐는 빈민층과 관련된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고담시에 토마스 웨인이 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면 그는 유력한 후보다. 하지만 억만장자인 토마스 웨인은 왜 사람들이 조커를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광대 마스크를 쓰고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광대라고 비하한다. 물론 그에 대한 사과도 없다. 그는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며 자신이 그들을 돕기 위해, 그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기 위해 시장에 출마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그들이 아직 잘 모르고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이 부분에서 CEO였던 경력을 살려 국가를 ‘경영’하겠다던 전 대통령 중 한 명이 생각났다. 국가를 이익 창출이 목표인 기업과 동일시 했던 그는 대통령 당선 후 기업과 부자를 위한 규제를 완화하며 ‘낙수효과’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했다. 그 말의 핵심은 일반 사람들은 기업, 부자들이 버는 돈의 부스러기나 받아 먹으라는 것)
사회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면서 그들을 돕기위해 시장이 되려 한다는 토마스 웨인. 그는 자선행사에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고 웃는다. 그에게 <모던 타임즈>는 그냥 코미디일 뿐 찰리 채플린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헤아릴 생각은 없는 듯 하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억만장자 사업가인 그는 왜 시장이 되고 싶은가. 경제영역에 이어 왜 정치영역까지 탐하는가.
독일의 사회학자 미하엘 하트만은 저서 <엘리트 제국의 몰락>에서 정치, 경제, 관료 엘리트들이 법과 정책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데이터와 사례를 들어 보여준다. 법과 정책이라는 사회시스템이 일부 계층의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됨으로써 사회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 경제 엘리트 토마스 웨인이 고담시의 시장이 되고 싶은 이유는 자명하다.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시장이라는 자리가 필요할 뿐이다. 다만 그는 이 이유를 대놓고 말하지 못하기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라는, 싸구려 명분을 이용한다.
토마스 웨인 같은 엘리트가 고담시에만 있을까. 왜 우리는 그런 엘리트들이 선거에 나오는 것을 당연시 할까. 나아가 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생활 환경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투표하지 않는가. 아직도 우리는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우리를 이끌어줘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 웨인이 조커의 아버지인지 아닌지 보다는 왜 그가 고담시 시장 후보로 출마했는지,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