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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을 들고 떠나는 지우처럼

내 아이의 친구, 그 엄마를 만나는 일

by 미네

지난해 여름, 포켓몬 빵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 우리 가족은 일 년에 한 번 맞은 한국행에 설레었었다. 지훈이는 출발 전부터 돼지고기가 가득한 한국 음식의 이름을 불러댔고, 우리는 그렇게 돼지고기를 그리며 한국에 도착했다.


코로나 19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인천공항에서 서울역을 향해 다시 공항 지하철을 타고, KTX 표를 예매하고, 그때의 우리는 이미 제법 지친 모습이었다.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과 가족, 친구들을 위해 이것저것 산 선물을 캐리어에 들고서, 오랜 비행 탓에 행색이 비루한 채로 서울역 분식점에 들어섰다.


우리는 떡볶이, 순대, 어묵을 시켰다. 서울역 한 모퉁이에서 분식점을 하시던, 팔에 제법 문신이 가득하셨던 그 사장님은 처음 먹는 사람처럼 환호하며 게걸스럽게 먹는 나의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그때 없어서 못 판다는 '포켓몬 빵'을 아들에게 주셨다. 근육질에 팔에 거뭇거뭇 문신도 있어서 약간 무서움이 느껴진 나와 달리, 아들은 '빵 싫어요.'라는 거절과 함께 순대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국의 유행은 알 턱이 없는 나의 아들은 순대가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지금도 '포켓몬스터' 만화 캐릭터를 전혀 모른다. 일전에 '피카추'를 가르쳐주었지만 그때뿐인지, 그가 아는 것은 이제 내게 다소 어려워지려고 하는 중장비들의 이름이 영어로 구체화된 것뿐이다.


한국의 유행, 누군가가 무얼 한다며 따라 하고 사는 것은 지금의 나의 아들에게, 그리고 나에게는 사실 아주 먼 이야기다. 포켓몬스터를 들고 가는 지우의 뾰족 머리도 지금의 아들에겐 너무 생소하다.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자연스레 젊은 시절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 인연이 끊어졌다. 나의 성격이 누군가에게 먼저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는 다정한 성격이 되지 못한 탓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합리화로 이런 부족한 내 곁에 지금까지 있어 주는 나의 사람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다.


매일 눈만 뜨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친구와 나는, 일 년에 겨우 한 번, 아니 이곳 이스탄불에 산다는 이유로 일 년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퇴근길을 함께하고 같이 여행을 가고 학교의 학생들의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 교사보다 어느새 지금의 나의 삶에서 아들의 친구의 엄마를 만나고, 공원에서 때론 놀이터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실 한국에서의 삶에서, 아들의 알레르기로 오랜 시간 교육기관의 이용이 없었던 내게는 이런 만남조차 없었다.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급하게 이스탄불로 떠나던 그때, 매일 아침, 같은 아파트,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던 아들 친구의 엄마의 맨 얼굴을 처음 본 것도 한국에서 이스탄불로 떠나기 이틀 전이 되어서야, 그녀가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보았다.


2021년 그해 가을, 아들 친구의 엄마의 맨 얼굴을 처음 보았다. 6개월 동안 매일 인사를 했건만, 내가 이스탄불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내가 떠나기 이틀 전, 이삿짐이 모두 빠지고 텅텅 빈 그곳에서, 아들 친구의 엄마 얼굴을 처음으로 만났다.


코로나 19로 우리는 매일 눈만 내놓은 채, 서로에게 매일 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놀았지만, 6개월이 지나고서야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아들을 낳고 생각보다 많은 인간관계의 변화를 맞이했다. 처음엔 이런 생활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나는 그런 삶에 익숙해졌다. 누군가를 우리 집에 초대하고 만나는 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 나의 삶에 매번 먼저 내게 전화를 하는 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내게 뜬금없이 한국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


"언니, 지금 뭐 해?"


그녀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나와 달리 밝고 따뜻하며, 늘 집에 있으려는 나를 가끔 밖으로 나가게 불렀다. 우리는 집 근처 자동차 모양의 쇼핑카트가 있는 대형마트에서 자주 만났고, 남편들이 같은 회사를 다니고, 우리의 아이가 발달 단계가 비슷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기가 편했다.


사실 나는 참으로 걱정이 많은 편인데 그녀가 가끔 나보다 걱정이 더 많아 그녀의 고민 상담을 들어주었고, 사실 그녀의 걱정이 나의 걱정과 같다며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리고 때론 그녀가 이런 나에게 언니는 잘하고 있다고, 부족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와 나이를 넘어, 친구가 되었고 그녀가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국에서 전화가 오면 반갑게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언니, 있잖아. 나 그동안 말했던 그곳으로 이사했어. 우리 아이들한테 좋은 환경을 주고 싶어."



그녀는 내게 늘 고민 상담을 한다. 내가 예전에 선생이었다는 이유로, 내가 그녀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녀는 내게 언니에게 말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져서, 참으로 분명해져서 좋다고 그녀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늘 한국에서 집에서 지훈이와 단둘이 있던 나를 꺼내 준 그녀가 오히려 나를 칭찬해 준다.

사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용감하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둘째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미루고 마음을 비웠다. 겨우 아이를 하나 이만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다시 내 마음속에 되새기며,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아이를 가질 수 있음에도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을 미루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일을 쉬고 있다. 언제든 다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들과 남편을 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나를 위한, 나의 일을 쉬고 있다. 나는 언제든 다시 일할 수 있다고 되뇐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되물으면서, 쓸데없는 잡념을 치우고 그동안 그 힘을 기르자며,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터키어 학원에 간다.


"아, 정말 공부하기 싫다. 그래, 그래도 이게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막연한 불안감을 내려놓고, 다시 학원으로 향한다.


나는 이곳에서 정말 다양한 엄마, 아빠를 만난다. 한국에서보다 그 역할과 신분이 참으로 다양하다. 집에 일하는 여러 사람을 두고 한 기업의 사장님인 남편을 둔 엄청난 재력의 엄마도 있고, 남편 또는 아내가 UN 산하의 국제기구에 일해서 늘 개발도상국을 돌며 해외에서 근무하며 살아가는 엄마나 아빠를 만난다.

다들 자신의 나라에서 아주 높은 자리이거나 한국이었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엄청난 재력 또는 경력을 가진 사람도 만나게 된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아버지는 나중에 자신의 아이가 미국 시민권을 갖길 바란다며, 아이가 국제학교에서 미국 학교에 가서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지금 공부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석유회사의 CFO인 남편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나라인 리비아에선 체계적인 교육이 되지 않는다며, 해외살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민 2세대인 미국인인 그녀는 자신은 미국인이지만, 아르메니아인이었던 엄마로 인해 미국에 살면서도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었다며 어린 시절, 자신의 정체성의 고민했던 그 시간을 자신의 아이들이 다시 겪질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모두 자신의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것은 모두 한 가지였다. 제 나름의 이유로 이스탄불의 삶을 결정했지만, 그들의 고민과 삶의 방향성은 한 가지였다.


자신의 아이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어서 자신의 고향을 떠나 이곳, 이스탄불 살이를 시작했다. 그렇다. 나 또한 남편의 주재원 생활에 동의한 건 아들 때문이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학력을 가진 것과 상관없이, 모두의 고민은 한 가지였다. 나의 아이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환경을 주기 위해서였다.



씩씩하게 둘째를 낳은 나보다 용감한 그녀는 내게 묻는다. 내가 그깟 선생이었다고, 그녀보다 용기가 없고 겁만 가득한 내게 그녀는 묻는다.


"언니, 나 드디어 말하던, 원하던 아파트에 이사 갔어. 우리 지우한테 새 친구도 만들어야 하고, 그 친구의 엄마도 만나서 잘 어울려야 하고, 나 말이야. 언니, 그 낯선 동네에서 잘할 수 있을까?"

아들 하나 꼴랑 낳고 일도 그만둔 용기 없는 내게, 나보다 훨씬 용감하고 씩씩한 그녀가 묻는다. 나는실상 아는 것이 없고 겉멋만 가득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너,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랑 아직도 연락하냐?"

"아니."

"나도 안 해. 우리 엄마는 그 친구 엄마랑 가끔 연락하지만, 지우 친구의 엄마는 네 친구지, 지우의 친구는 지우가 스스로 정할 거야."


그녀는 이런 대답을 하는 내게, 그녀는 다시 고맙다며 나를 안심시켜 줘서 고맙다며, 나보다 용감한 그녀가 내게 나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시 말한다.


아직 어린 둘째를 품에 안고, 첫째가 시작하는 초등학교 앞을 종종 거리며 달려가고 있을 너는 그 누구보다 용감하고 씩씩하다고 다시 한번 말해본다.




나는 다시 예전에 봤던 '포켓몬스터'를 떠올린다. 머리가 삐죽삐죽한 주인공 지우가 동그란 공을 던진다. 그리곤 동그란 공 속에서 포켓몬은 용감하게 뛰어나와 상대방의 포켓몬과 맹렬하게 싸우거나 서로 함께 놀기도 한다.


그때, 포켓몬을 꺼냈던 지우가 할 수 있던 유일한 일은, 포켓몬이 힘이 들어 보일 때, 힘내라는 응원이었다. 포켓몬이 행복해 보일 때는 그는 함께 웃어주었다. 지우는 포켓몬 대신 싸울 수도 없고, 직접친구를 만들어 줄 수도 없다.


지우는 포켓몬이 싸우다가 다칠 때, 그저 포켓몬과 함께 울고, 너무 지친 포켓몬스터를 다시 공 속으로 넣어 그들을 다시 쉴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전부였다.

지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그것뿐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포켓몬은, 아니 포켓몬이 아닌 우리의 아이들은 네 주머니 안에 있을 때만 내 것일 뿐. 주머니 밖으로 나가는 순간, 아니 세상이라는 곳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그 아이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아이는 그 아이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그런 아이를 사랑하는 우리는 참으로 삶이 어렵다.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이를 사랑하는 우리는 참으로 삶이 어렵다. 나는 나보다 걱정이 많지만, 나보다 용감한 그녀에게 선생이었다는 이유로 다시 말한다.


"지우의 친구는 지우가 만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이미 잘하고 있어. 이미 충분히."


그녀가 이런 나를, 부족한 나를 늘 언니라고 부르며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오늘, 여전히 나는 참으로 그녀가 고맙다.

'포켓몬스터'의 지우처럼, 그녀의 모험이 그리고 나의 이 모험이 늘 행복할 순 없겠지만 건강하고 아름답게 끝나기를, 모든 엄마와 아빠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너무 부족한 나를, 우리는 서로를 다시 한번 안아준다.




덧붙임)

국제학교에서 '스타워즈'의 날이 있었습니다. 지훈이가 우주인이라며 직접 스스로 만든 우주복입니다. 학교에 가서 그 기능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곤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집에 왔습니다. 오늘은 담임선생님의 칭찬 가득한 메일도 받았습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자식 자랑은 원래 돈을 주고 해야 한다는데, 글을 드리며 자식 자랑을 해봅니다. 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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