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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 아빠

아버지, 당신의 청춘 속의 기억 그리고 누군가의 첫 집

by 미네

지난 여름 일 년 만의 한국행, 나는 오랜만에 나의 옛 집에 갔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면, 나의 빨간 벽돌집에는 대추가 열린 나무가 우거지고 아빠는 그 대추를 따기 위해 진한 파란색의 넓은 비닐 천막을 펼쳐 도로가에 놓았다. 주말을 맞아 방바닥에 붙어 내 몸을 더 누이고 싶었지만, 막대기를 든 아빠의 손은 세차게 흔들렸다.

일어나라는 아빠의 부름에 하기 싫다며 어기적거리며 나와, 목장갑을 끼고 파란 비닐 아래 떨어진 연둣빛과 검붉은 색이 뒤섞인 대추를 주웠다.


내가 선생이던 시절, 근무하던 학교가 집 근처라 내가 가르치던 학생이 길을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면 아빠는 황급히 한 움큼 대추알을 집어 나의 제자에게 전해주었다. 어쩌면 그때의 아빠는 내게 선생님이라며 부르는 아이들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그 순간을 참으로 좋아했다.

꼼짝도 하기 싫었던 몸을 일으켜 대추를 줍다 보면, 어느새 더 눕고 싶던 그 마음도 잊고, 도로에 차라도 지나가 타다닥거리며 부서지는 대추알들을 아까워하며 정신없이 굴러가는 대추알을 주웠다. 어쩌다 검붉은 대추알들 속에 털이 숭숭 난 송충이라도 보면 혼이 빠지게 나는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 벌레야. 나 못 잡아. 못 잡아."


그렇게 그는 그의 이름을 잃고 내게 아빠가 되었다.


이 대추나무는 아빠가 빨간 벽돌집을 지을 때, 아빠의 고향집에서 가져온 작은 묘목이었는데,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우리 집 대추나무를 부러워했다. 도로가에 드리워진 나뭇가지와 그에 열린 대추알 그리고 대문을 둘러싼 고운 장미 덩굴과 빨간 벽돌집, 참으로 싱그러웠다.

젊은 엄마는 자신들이 지은 집을 세심하게 가꾸었다. 그녀는 주말이면 계단 하나하나를 솔로 문질러 청소를 했고, 대학가 근처였던 우리 집의 반지하 자취방은 항상 대학생으로 가득했다. 지금이야 반지하방에 살려고 하는 대학생이 없어진 탓에 창고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이 방에서 공부를 해서 취업을 했다며 소식을 전하는 청년도 있었다. 엄마는 세입자가 바뀔 때면 락스와 고무장갑을 끼고 집을 청소했고, 나 또한 일정 나이가 되곤 엄마를 따라 세입자가 떠난 방을 청소하는 엄마를 도왔다.

세상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것처럼 빨간 벽돌집에 살던 세입자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엄마는 그 속에서 점차 억세고 강한 아줌마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자라나 친구가 생겼고, 나의 집의 작고 아담한 다락방에 친구들을 초대했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세 채의 집을 샀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집까지 포함한다면 그는 그의 노력으로 총 세 번의 집을 샀다. 그가 처음 산 집에 대한 분명한 기억은 없다. 그가 해외에서 오랜 시간 건설노동자로 일하면서, 아내와 언니를 한국에 두고 어렵게 일해서 번 돈으로 산 집이란 사실만이 강렬하다.

분명한 기억이 없이 그저 하나의 이미지만 있는 그 집에선 나는 집의 철문 사이로 목을 내밀어 마당에 들어오던 고양이를 기억한다. 나무 덩굴이 의자처럼 놓여있었는데, 언니와 나는 그 집의 기억이 아름답건만, 친정 엄마의 기억 속엔 자신의 젊은 시절 시집살이와 첫 집을 사고 겪은 여러 어려움이 중첩되어 나와 언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기억이었다.

비 오는 날, 긴 처마 아래에서 기어 다니는 지렁이를 본 나의 기억과 달리 엄마는 나를 임신한 채 언니의 손을 잡고 연탄을 갈고, 연탄가스가 새고, 집에 불이 나서 나의 돌 사진이 모두 불타버린, 내 머릿속에 없는 그녀의 청춘, 그 아픔을 이야기한다.

나는 친정집 사진 속에 너무나 어린 나를 발견한다. 머리가 꼬불꼬불하고 작고 귀엽던 나의 언니는 아토피에 머리를 박박 밀어 남자아이 같은 나를 세발자전거 뒷 자석에 태우곤 행복하게 웃고 있다.

지금이야 누가 사진을 찍으라고 하면 어색해서 죽겠다는 듯,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데 그때의 나는 사진기를 들고 있는 아빠와 엄마가 퍽이나 좋았나 보다.


언니와 나는, 사진 속엔 없는 너무나 젊은 아빠와 엄마를 보며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해맑게 웃고 있다.



아빠는 첫 번째 집을 팔고, 건설업을 하던 지인에게 자신의 생애 두 번째 집 짓도록 요청한다. 내 기억에 아빠와 엄마는 기초공사가 마무리되고 콘크리트만 있던 그곳에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는 주말이면 버스를 타고 우리를 데리고 가서, 근처 슈퍼마켓에 들러 공사장 인부들을 위한 새참을 준비했다. 때론 우유와 빵, 어떤 때는 떡 그리고 엄마가 직접 만든 국수까지 들고 새 집으로 향했다.

그들을 항상 새집으로 가는 길, 늘 두 손 한가득 무언가를 샀다. 그리곤 한참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일하는 공사 인부들에게 연신 공사를 잘해달라며 부탁했다.

그때의 그 집은 그에게 이미 한 채의 집이 아니었다. 그가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를 돌며 더운 땡볕 속에 혼자 서 있는 아버지, 그의 젊음의 모든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한국에 두고, 그는 공사장 속에서 새참이라며 매일 건네는 바나나를 허공에 던졌다. 매일 주는 바나나가 지겨웠던 그는, 타국 땅의 바다에서 그것을 던졌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그곳에서 그의 설움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그 해 여름을 견뎌냈다. 그리고 건물이 다 지어진 후, 한국에 돌아온 그에게 나의 언니는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국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의 그는 언니에게 아빠가 되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가끔 텔레비전 화면 속 싱가포르의 유명 건물이 비칠 때면 저 건물은 내가 지은 거라며 싱거운 웃음으로 자신의 청춘을 이야기한다.



그와 그녀의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었을 때 즈음, 그들은 그 시절의 빨간 벽돌집을 떠났다. 그동안 엄마가 살고 싶다던 건설사가 지은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그 집을 팔지 않았다. 내가 시집가기 전, 내가 나라는 인간으로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살아있는, 유년 시절의 옛 집.


낡은 집에 어울리지 않게 현관문은 이제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전자식 도어록이 달렸고, 칠순이 넘은 그는 세입자가 떠난 빨간 벽돌집의 비밀번호를 바꾸려고 끙끙 대셨나 보다. 이스탄불에서 일 년의 한 번, 한국에 오는 나를 태워 무수한 아파트들을 벗어나 그의 오래된 차를 타고 나의 옛 집, 빨간 벽돌집 앞에 내렸다.

그는 이제는 엄마가 된 딸과 손자가 함께다. 아직 어린 손자는 자신이 아는 아파트와 다른, 이제는 엄마의 손길과 아빠의 사랑이 덜해진, 할아버지가 된 그의 옛 집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린다.

아들은 집이 너무 낡았단다. 나도 한참을 검은 칠이 벗겨진 대문 옆 아빠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보며, 우거진 대추나무를 꺾어본다. 먼지가 쌓인 아빠의 이름이 잘 보이길 바라면서 나는 나무줄기를 꺾어 때 묻은 명패의 아빠의 이름을 드러낸다.

명패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빠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나의 아들은 한자로 적힌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럴듯하게 읽는다. 마치 저 한자를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낡은 집 앞 처음 아빠가 나를 이 집에 데리고 왔던 일곱 살, 그때의 내가 서 있다.


아들이 그때의 나의 나이로 빨간 벽돌집, 그 자리에 세 사람이 서 있다.

아들은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그의 이름을 제법 또박또박하게 다시 읽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의 이름을 되새긴다. 그도 처음부터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나는 그때부터 그의 이름 대신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게 그의 청춘은 아빠의 오래된 옛 집 앞에 여전히 굵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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