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뷰(weekly review), 매주 금요일이면 아들은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5지 선다형 시험이 아니라 문제의 답은 모두 서술형, 주관식이다. 아이의 정답을 읽어보면 솔직히 스펠링 오류뿐만 아니라 문장의 비문 등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처음 아들의 문장의 'made'는 'maid' 였다가 시험을 칠 때마다 몇 번을 가르쳐 준 덕분에 이제는 온전한 'made'가 되었다. 한참을 아들의 오류 가득한 문장을 수정하려고, 하기 싫다는 아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한국식 빽빽이를 쓰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겨우 한 번 아들의 문장을 표기가 제대로 된 이야기로 바꾼다. 표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은 암호 해독과 같다는 나의 말에, 아들은 하기 싫은 마음을 가득 품고 자신의 말을 꾸역꾸역 온전한 영어 글로 그의 문장을 바꾼다.
"여하튼 잘했다."
화가 쏟아 오르는 교육, 친자식 인증을 하며 그를 여전히 가르치고 있지만, 정말 분명한 건 내가 아들의 나이일 때 ABC는커녕 한글 맞춤법도 똑바로 못 썼지만 현재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아들을 걱정하는 건, 솔직히 아주 쓸데없는 짓이다. 나는 종종 그에게 말한다.
"네가 나보다 훨씬 잘할 거야. 결국 언젠가는 내가 너한테 배울 테니까."
위클리 리뷰의 문제 중, 문제에 제시된 단어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만들라는 문제를 ChatGPT*에 적고 아이가 적은 문장과 비교해 본다. 아들이 쓴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가 좋아해서 생뚱맞게 등장하는 공룡은 ChatGPT엔 없다. 어쩌면 공룡이란 단어를 10번 사용해서 이 문장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면 그것은 또 금세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것은 아들의 문장을 비문 없는 영어 문장으로 클릭 몇 번으로 쉽게 만들어낸다. 나보다 영어 실력이 분명히 나은 그 녀석의 프롬프트(prompt)의 반짝이는 선을 향해 'more'(더 많이)를 적는다. 순식간에 또 다른 이야기를 찍어낸다. 아이의 말과는 다르지만 그 속도는 분명 빠르다.
그 속도의 무서움, 아이가 살 세상은 분명 내가 살았던 40년의 세월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나는 나의 아들을 무척 사랑한다. 가끔 누군가 내게 왜 글을 쓰냐고 물으면, 내 이름의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하지만 결국 모든 삶의 선택에서 우선순위는 아들이다. 책이고 글이고 내 삶에서 아들의 존재를 넘어설 수 없다. 내가 다른 누군가의 책을 읽고 또다시 글을 쓰는 이유도 어쩌면 내가 더 이상 아들보다 총명하지 못할 때, 아들이 지금 마흔의 젊은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며 자신을 키웠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서를 읽고 사람들이현재를 읽듯이, 삼국지를 보고 오늘의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시간이 변하여도 비슷하다.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새로운 변화가 물 밀듯이 들어올 때, 두려움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들의 나이가 서른이 넘어갈 시점이면 나는 분명 그에게 안정과 안위를 그의 삶에 요청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도 그랬다. 누구보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아니 어쩌면 그 시대에선 가장 평범했던 베이비부머 세대인 두 사람도 내가 성장한 후, 언제나 내게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글을 적는 나 또한 지금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가족의 행복과 안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대다수 가장 평범한 선택, 누군가가 많이 간 길을 따라간다.
변화, 새로운 시작.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어쩌면 이렇게 내가 이스탄불에 살기로 결정한 것도 남편의 도전, 그 변화의 열망을 응원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그 성장으로 오는 변화를 무서워한다.
내 글의 조회수는 브런치스토리의 에디터가 선택이없다면, 아주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늘 비슷하다. '주재원' '이스탄불 주재원'이 주요 검색어로 나의 글을 찾아 들어오고, 그리고 구독 없이 그저 글을 읽고만 가기도 한다. 새로운 주재원이 오는 시기가 되면, 내가 초기에 한창 힘들게 쓴 특정 글의 조회수가 아주 집중적으로 오르기도 하고, 나는 그 사람을 모르는데 누군가는 나를 알고, 나를 이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을 걸고, 때론 그저 나의 글로 이스탄불의 시작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글은 결국 나의 시선에서 나의 삶의 궤도에서 적힌 것이기에 한없는 부끄럼을 느낀다. 가끔 지난 글들을 모두 보이지 않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나 또한 나 자신을 드러내기에 두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계속 나의 생각을 글로 쓰고 있다. 누군가의 무례한 생각이 가져오는 상처를 마음속에 담고서, 묵묵히 글을 쓴다.
나는 ChatGPT의 프롬프트의 'can you explain more?'이란 한 문장을 적는다. 그것은 순식간에 나의 이름에 대한 무수한 정의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정의일 뿐,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그것을 이용하여 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가장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그것보다 느리지만, 나 자신을 선택하고 지금 이 순간도 나 자신을 가장 나답게 할 그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하기에 나의 글을 읽는 사람도 같은 상황에서 모두 다른 선택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내일은 튀르키예의 스승의 날이다. 작년의 나는 학교에 가서 스승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나의 튀르키예어 선생님을 위한 꽃을 사서 비 내리는 이스탄불의 오르막내리막 길을 걸어갔다. 프롬프트에 적힌 답변보다 한참은 느렸지만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걸어갔다. 수줍게 건네는 나의 작은 꽃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는 나답게 아주 느리게 살아갔다.
빠른 속도로 점철된 모든 것들에 둘러싸인 지금, 때론 한국의 어느 도시보다 느린 이스탄불의 속도에때론 화를 내고, 때론 그 느림에 감사하며 나는그 모든 변화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이스탄불은 그대로이건만 나는 계속 달라지고 있다. 결국 사람, 어떤 속도 속에서도 나는, 가장 느릴 것 같지만 어쩌면 나보다 가장 빨리 자라고 있는 사람, 아들을 바라본다. 내일은 다시 학교로 향한다.
결국 사람, 너는 지금 참 잘 살고 있다.
*영어를 공부하신다면, ChatGPT를 반드시 사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이들의 문장이 그리고 당신의 문장이 보다 풍부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