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여러 가지 종교가 있습니다만, 제 생각엔 결국 다 같은 신을 모시고 있는 겁니다.'
버트런드 러셀*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얼마 전, 독실한 언니가 내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함께 가자고 말했다. 나는 안다. 그녀가 이 이스탄불의 공간에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장소가 그곳이라는 것을, 그녀는 내가 이스탄불에서 만난 가장 착하고 어진 사람이다. 그녀는 요즘 힘들어 보이는 내게 따뜻한 김칫국을 끓여 내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그녀와 가끔 신, 종교 이런 이야기도 한다. 그녀의 제안을 감사히 생각하며 뜨끈한 김칫국만 먹고 가면 될 것을, 나는쓸데없이매사에 진지하다.
나는 가끔 나 스스로를 두 가지 모습으로 평가한다. 한쪽에 서 있는 나는 참으로 게으르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있는 나는 정말 부지런하다. 나는 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바라본다. 때론 누구보다 바쁘고, 가끔 누구보다 느긋하다. 나는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다 이스탄불의 일상에서, 바쁘고 부지런한 내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는 나를 아주 부지런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기억할 테고, 어쩌다 내가 느긋해졌을 때 나를 발견한 사람은 나를 무척 게으른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매일 달이 변하듯 아주 조금씩 변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꽤 부지런하다 할지라도, 나보다 바쁘고 계획적인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에선 나는 꽤나 여유를 부리는 사람일 것이다. 맞다. 나를 가장 잘 안다고 할 남편의 눈에서조차 때론 나는, 가끔 너무 느긋한 곰 같은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학교에서 근무할 때 종종 아이들의 싸움을 목격할 때가 있다. 친구들이 몰려와 싸움을 보고 나를 부르는, 사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남학생들의 싸움에선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사춘기의 녀석들이며 여학생들처럼 그저 감정적으로만 싸우진 않으니, 가끔 교실의 의자도 던지고 유리창도 깨고 그런 일은 가끔 있다. 물론 이런 일이 아주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사건이 끝나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들 각자 분노의 이유는 아주 명확했다.
진정이 된 아이들을 불러 각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 그 자리에서 싸울 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때론 이 싸움에서 내 감정뿐만 아니라 옆의 다른 아이들의 시선 때문에 그와 같은 결정을 하기도 한다. 둘은 그렇게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싸움이 끝나고 이 모든 이야기는 고작 이 한 줄의 문장으로 끝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A가 B를 놀렸고, 결국 B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쉬는 시간 B가 A를 주먹으로 때렸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B는 놀림을 당했지만 A를 주먹으로 심하게 때렸고, A는 B를 놀렸다. 옆에서 본 반 친구들도 B가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A가 상당히 많이 다쳤다. 급하게 A는 병원에 갔다. A의 부모는 화가 나 있고 분노한다. 과연 지금, B가 A를 때린 것은 합당한 것인가. 그럼 B는 계속 A에게 놀림을 당해야 하는가.
나는 교사로서 늘 거기에 서 있었다.
누군가와 누군가의 관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는 서로 다른 기억과 이야기를 만난다. 어떤 사람은 같은 일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받아들이고 분명 같은 사건이건만 서로 다르게 이야기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글을 쓰며 바라보고 있는 저 커피잔이 나의 시선에선 손잡이가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겠지만, 반대편의 다른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에선 손잡이가 없는 둥근 잔의 모습으로 그려질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어떤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되새긴다.
어쩌면 우리가 같이 있었다고 하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린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친정 엄마는 가끔 예전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신다. 젊은 시절 주야간 근무를 하던 아버지 없이 매달마다 시골로 제사에 가야 했던 엄마는 그 시절의 순간을 고통으로 이야기하시지만, 나는 큰 마을에 제사 준비하러 바쁘게 무언가를 하던 엄마의 고생을 뒤로하고, 엄마의 언니인 이모가 살던 작은 마을로 걸어가던 추억을 떠올린다. 바지를 걷어올려 개울가를 넘어가서 이모집 앞 작은 가게에서 무언가를 샀다. 추억 속, 엄마가 지친 듯 이모네에 가면 마당 널찍한 한 구석, 박스에 담겨있던 베#밀 두유를 꺼내 빨대를 꽂아 주시던 엄마의 언니, 이모가 생각난다. 난 그 일상이 꽤나 괜찮았는데 말이다.
엄마는 자신의 언니가 시집 온 동네에서 성실하다고 소문난 효자 막내아들에게 그렇게 시집을 왔다. 그런데 아빠가 효자이니 엄마는 참으로 피곤했나 보다. 그런데 딸 입장에서 살펴보면 아빠는 양가에 모두 효자였다. 그래서 그는 더 바빴다. 아빠가 누군가의 효자, 성실한 근로자가 되느라 누군가의 남편인 것은 게을리했던 건지 엄마는 지난 시절 아빠 욕을 가끔 한다. 아하하하.
나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때론 박쥐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랬구나."
아빠도 엄마도 그 시절, 두 사람은 꽤 힘들고 외로웠나 보다.
지금의 나처럼, 우리처럼 그들은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무엇이 되느라 참 힘들었나 보다.
이스탄불에 와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 사람, 미국 사람, 튀르키예 사람, 방글라데시 사람, 러시아 사람, 우즈베키스탄 사람. 너무 다양하고 다른 사람들이다. 고작 마흔의 나이 언저리에 다들 다른 인생을 살아가다 모두 우연히 이스탄불에 모였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생각과 반응을 한다.
누구는 커피잔의 위를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커피잔의 옆을 보고, 누군가는 그 잔을 들어 올려 바닥까지 살피고 이야기한다. 참으로 다르다. 나는 가만히 내 앞의 커피잔을 바라본다.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잔을 이리저리 돌려 자로 재어 숫자로 표현하면 정확할까 하며 애꿎은 녀석을 만져본다.
나는 어느 방향으로 보면 손잡이도 없는 투박한 잔 같지만, 또 다른 방향으론 손잡이가 있는 그런 흔하디 흔한 작고 여린 잔이 된다.
내가 그러하듯, 당신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지금, 참으로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서 있다. 그러나 결국 한 가지, 행복이라는 그 한 가지를 위해, 그 신을 만나기 위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지금 이곳에 서 있다.
*불가지론의 대표자,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은 몇몇 명제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 또는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이다. (위키백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