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의 숫자가 반복적으로 적힌다. 아라비아 숫자로 담긴 그의 세계, 아니 보다 정확한 기계의 세계. 0과 1은 화면에 담긴다.
010111011110.
남편의 휴대폰 갤러리를 볼 기회가 있어 살펴보면 그의 사진들 속에는 알 수 없는 숫자와 알파벳이 적혀있다.0과 1 단 두 개의 숫자의 디지털 세계, 이 두 개의 숫자로 그는 컴퓨터와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 것인가. 새삼 나는 그가 사용하는 컴퓨터 언어를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도 내가 문과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나로선 고작 그의 갤러리의 사진 몇 장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 해석에 고달파한다.
아들의 성화로 매머드의 모습을 살피면서 '도구와 기계의 원리*'라는 책을 펼쳐 디지털 세계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아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요즘 나는 나의 도식체계, 스키마*에 대해 자주 의심을 한다. 아들에게 설명하려고 이해하고 있는 디지털의 세계를 내가 제대로 알고 떠드는 것이 맞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 읽었던 예전 책을 다시 파고들고, 그 책을 바라본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제대로 아는 게 맞는가. 나는 나를 의심한다.
사람은 모두 세상이란 같은 책을 들고 있지만, 각자의 스키마에 의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나 또한 어느 누구처럼 그 책을 들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밑줄 그은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보지만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아직잘 모르겠다.
마치 아들과의 대화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무수한 통신 오류처럼, 그래도 다시 책을 펼친다.
지난 금요일, 튀르키예의 스승의 날이었다. 나는 한동안 정신없이 일상을 보냈고 괜찮은 척 웃고 걸었다. 여전히 잘 되지 않지만 예전처럼 그 감정 속에 허우적거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 커다란 세상에서 내 슬픔은 아주 작은 가시에 불과하기에, 정말 힘든 사람을 위해 멀쩡한 척 살아야 세상이 온전히 돌아간다고 믿는다.
나 하나 갑자기 없어진다고 아무 문제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무 일 없는 듯 걸어야 했다.
작년 내가 반 대표 엄마가 된 지 1년 차일 때, 한국에 있는 오랜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했다. 나를 아는 친구는 별 일이 아닌 듯 이야기한다.
"머리 쓰지 말고, 마음도 쓰지 말고 애도 쓰지 말고, 돈을 써."
일찍 시집을 가서, 어느새 큰 아이를 둔 친구는 큰 웃음으로 이야기한다. 그녀는 내게 어떤 집단에서 누구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들으면 결국 네가 병이 난다며 돈만 쓰라고 이야기한다. 네게 넌 이미 학교에서 온갖 일 다 겪어서 누구보다 잘 알지 않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저런 이야기하지 말고, 돈을 쓸 것이지 애는 쓰지 말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게 그렇게 쉽나. 그래. 내 성격이 문제다.
아들은 유럽의 학제에 따라 9월에 새 학년을 시작했고, 영국계 교사와 튀르키예인 보조교사 아래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아들은 현재 학교 생활을 참 즐기고, 다양한 문화, 인종의 사람들과 엄청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우리 동네의 도보로 20분 거리가 내 세상의 크기였던 것과 달리 아들은 아프리카가 고향인 아버지와 함께 사파리에서 지프 투어를 갔다가 고립된 경험을 듣고, 때론 아직 결혼을 안 한 스코틀랜드 선생님이 왜 결혼을 미루고 있는지도 듣는다. 아들은 이스탄불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사회 문화적 배경에 따라 사람들은 아주 다른 결정을 한다는 것을 벌써 배우고 있다.
무궁무진한 아들의 학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이 이야기가 전부 진실인지 가끔 거짓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어른인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한다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교실 환경이 아주 밀접하게 작은 구성원이기에,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몸으로 하는 운동보다 누군가랑 잡담하는 것을 즐기는 너란 녀석을 보면, 어쩌면 저 많은 이야기 중 일부는 꽤 심각한 누군가의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초임 교사 시절의 제법 성숙한 여중생들은 나를 마치 잘 아는 언니처럼 대하기도 하고, 연애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걸리면(?) 내게 진지하게 그 남자에 대한 평가를 해대니,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는 어쩌면 부모와 자식보다 더 편하게 자신의 고민을 말하는 상대가 아닐까 싶기도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순수하기에 어른인 내가 체면 때문에 말하기 어려웠을 그 솔직한 마음까지 쉽게 이야기하곤 했다.
아들과 불을 끄고, 이부자리에 누우면 아들은 오늘의 일들을 쏟아낸다. 힘든 일도 좋은 일도 하나씩 나온다. 그의 이야기 속, 튀르키예계 보조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이 항상 'Asla'라고 부른다기에, 나는 그동안 그녀의 이름을 'Aslan'이라고 생각했다. 왜 여자 이름을 '사자(Aslan:튀르키예어로 사자)'로 지었지라며, 선생님의 부모님이 선생님의 동생을 아들로 낳고 싶으셨나 하며, 예전 한국과 튀르키예 사회가 아들을 중시하던 사회 분위기를 떠올리며 내 나름의 스키마를 이용하여 보조 선생님의 이름을 석 달 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
새 학기가 되어 알레르기 상담을 위해 두 선생님을 학교에서 만났을 때조차, 그녀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림에도 한 번도 내게 제 이름은 'Aslan(lion)'이 아니라 'Aslı(original)'라고 말하지 않은 그녀.튀르키예 스승의 날, 그녀에게 꽃과 선물을 건네며 당신의 이름을 잘못 알고 불렀던 것을 사과했더니, 보조교사인 자신을 먼저 부르고 무언가를 꼭 챙겨주려고 하신 게 더 고마웠다는 그녀의 대답이 내 마음을 저리게 했다.
자신의 이름을부르고 커피를 건네는 나의 마음이 더 고마웠다는 그녀의 말, 그녀의 웃음에 다시금 마흔의 나는 아들, 너와 나의 통신 오류를 바라본다. 나의 말은 0과 1로 이루어진 숫자가 아니기에 무수한 문제가 생겨난다. 비록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다시금 나 스스로가 진실해지기 바란다. 내 욕심에 있는 멋진 청년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씩씩하게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그 사람에게도 그 진심을 알아주고 웃으며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을 받아들이길. 부디 이 추운 겨울을 모두가 잘 보내길 바라본다.
지금 이스탄불은 참으로 춥고 비가 많이 오며, 바람이 분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와 나의 오류가 어떻든, 내 앞의 아들이 그저 원래의 그 자신의 모습으로 살길 바란다. 그리곤 한편으론 아들이 남들이 말하는 그런 괜찮은 청년으로 자라길 바라는 속마음을 내려놓고 말이다. 그 욕심을 조용히 내려놓고 네 모습대로 그 모습 그대로 살길 바라본다.
이스탄불, 이곳의 나는 여전히 이렇게 애쓰며 너와의 통신 오류 앞에 있다.
*1988년 데이비드 맥컬레이 그리고 넬 아들리가 기술적인 글을 쓴 어린이용 책이다. 이 책은 누구나 일상에서 만나는 기계들을 다루고 있으며, 간단한 지레와 기어에서부터 자동변속, 그리고 최근 판에서 들어서는 컴퓨터와 터치스크린, 그리고 스마트폰 등을 다루고 있다. 도구와 기계의 원리의 다이어그램은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재미있으며, 그리고 또한 매머드의 일상에서의 역할(가상)을 그려놓고 있다. (위키백과 참고)
*스키마(schema, 도식)는 인공지능, 인지과학, 언어학 등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개념으로 지식을 표상하는 구조를 말한다. 어떤 정보가 입력되었을 때 그 정보를 처리할 때 필연적으로 사용된다.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진행해 지각하지 못 하지만 이것이 개념 트리화 시켜 익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