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 겁 없이 긴 여행을 선포한 신참 교사 두 명은 여행 전날까지 교무실에서 2학기 시간표를 돌리고 있었다. 과목별 수업시수를 확인하고, 시수에 맞추어 시간표를 짜고 일부 선생님의 상황과 특별 교실을 맞추어 다시 수정을 했다. 1학기에 처음 해 본 일과 업무, 몇 시간 동안 만든 시간표를 뒤엎고 다시 작성하고 일과 업무가 처음이었던 두 교사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반복했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둘은 정신없이 학교를 떠났다. 사실 이것이 제대로 되었는지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바로 내일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지 않을 사람들처럼, 업무를 마치고 교무실 불을 끄니 깜깜한 어둠 속에 비상구를 알리는 등만이 두 사람 앞에 있었다.
어쩌면 그 교무실 속 서로가 없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그 시절 그 객기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2012년 제8호 태풍 '비센티'는 고요했던 홍콩을 마비시켰다. 홍콩 공항의 모든 출입문은 안전을 위해 폐쇄되었고, 이미 한국에서 모든 짐을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부친 탓에 내 손에 든 건 카디건이 든 작은 백팩이었다. 홍콩의 대중교통은 통제되고 비행기가 하나씩 지연을 알리던 상태에서, 결국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할 우리의 비행기는 결항되었다.
거지꼴로 홍콩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음식 쿠폰을 들고 공짜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섰다. 모든 사람들이 공항에 갇힌 상태에서 우리는 공항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항공사가 배부한 담요에 의지해 잠을 청했다. 자연히 프랑크푸르트의 이틀 간의 일정은 사라졌고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급하게 뮌헨 중앙역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기대했던 것이 우리에게 온전히 사라졌지만 우리는 참으로 밝았다. 그다음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며 독일은 이번 유럽여행에서 중요한 코스가 아니라며 서로를 향해 웃었다. 너무나 젊었던 아니 너무 어렸던 나와 그녀는 이제껏 태풍이라곤 만난 적이 없는 듯 해맑게 독일 거리를 걸었다. 그리곤 그녀와 나는 한산한 독일 지하철의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여행 인증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아픈 척, 피곤한 척, 슬픈 척, 기쁜 척, 예쁜 척. 지금이라면 피곤하다며 절대 하지 않을 온갖 척을 다하고 사진을 남겼다.
"선생님, 여기 사람들 우리를 전혀 안 쳐다본다."
흔히 노잼이라 불리던 독일에서, 고작 U반 지하철에 올라타고서 우리는 모든 것이 재밌는 듯이 까르르거렸다. 독일인은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우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이한 순간이다.
우리는 태풍의 시작인 줄도 모른 채 홍콩 시내로 나갔다 어렵게 돌아왔다. 젖은 옷을 말리며 공항의 의자에서 서로를 의지했던 그 예상치 못한 그 여행의 시작이 서로를 더 이해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이동도 없이 공항 의자에 앉아수다를 떨었다.
지난 소개팅부터 학교 아이들, 시험, 미래, 결혼, 가정사.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소소하고 소중했던 그 시절의 고민들을 그녀와 함께 나누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나와 달리 독일 맥주를 손에 들지 않고도 한껏 여행에 취해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여기라며, 그리고 그다음은, 그다음을 이야기하며 우리 생애의 처음 주어진 이 자유를 최대한 사용할 거라며 이 모든 여행 일정을 다 해내리라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생애 처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를 한껏 들뜨게 한다. 분명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건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우습게도, 아주 작은 일에도 퍽 신나게 웃었다.
2023년 6월 27일
아들은 마리엔 광장에서 묻는다.
"엄마, 여기 왜 왔어? 도시마다 또 광장이야."
"여기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여기 왔는데, 같이 왔던 선생님이랑 홍콩에서 태풍을 맞고 거지꼴이 되어서 도착했는데 말이야."
시간이 지나 그녀도 한 아이의 엄마,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 예전처럼 우리는 학교에서 매일 만나지 않게 되었고 학교 아이들 이야기와 어려움을 이야기하느라 퇴근 후를 함께 보낼 수없게 되었다.
어쩌면 다시 학교에 돌아가 그녀를 만나더라도, 예전처럼 자유롭게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느라 퇴근 후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쁘게 집으로 향해 밥솥에 쌀을 안치고 학원을 마치고 오는 아이를 씻기고 그리고 책을 읽어주다가 함께 지쳐 잠이 들 것이다. 그리고 아주 어렵게 다시 한 학교에서 만나, 교실로 향하는 서로를 향해 눈을 마주치고 웃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이라서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새로웠던 내가 없어졌지만 한편으론, 똑같은 실수를 하는 나를 돌머리라며 한없이 자책하던 그 처음의 시간 또한 함께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다시 무수한 처음을 맞이할 아이 앞에 서 있다.
꼬질꼬질하고 기름이 줄줄 흐르는 머리를 하고서도 함박웃음을 짓던 그녀와 나를 뮌헨의 마리엔 광장에서 다시 그려본다. 아들과 남편은 나의 웃음의 이유를 모를 테지만, 마리엔 광장의 꽃가게에서 꽃송이를 보고, 다시 어렵게 한 잔의 맥주를 마시면서도 그녀의 밝은 웃음이 무심결에 떠오르는 것은 내게 그 시절, 그 모든 게 이곳 유럽에서,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그녀의 기억은 이제 엄마의 기억이 되어, 그때의 나처럼 처음이 많은 아들 앞에 따뜻하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