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티 Mar 31. 2024

4시 44분(1)

-동굴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04-

  달빛이 그윽하니 멋진 밤이었다. 손꼽아 기다렸던 시간이기도 했다. 낮의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하고 싶은 말을 눌러 담아  약속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짐도 무색하게 나는 또 마음이 약해 지는 것을 느꼈다. 반가움인지 좋은 건지 반가워서 좋은 건지, 좋아서 반가운 건지. 나는 이런 감정의 혼란이 싫어 마음을 개방하지 않으려고 애써온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마주 앉은  진에게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솔직해진다. 

이건 좋은 게 아니라 편한 거구나. 마치 자매같이. 아니면 쌍둥이같이. 하지만 간단한 문제 또한 아니다.


  처음 진이 사수가 되었을 때 무척이나 빡빡하게 굴었다. 작은 실수라도 하나에도 노이로제가 걸릴듯 나를 몰아 세웠다. 덕분에 한 달만에 나는 그 작은 실수들의 70퍼센트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진은

근무중에는 나를  매우  엄격하게  대한다. 반면에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그는 매우 관대하다. 또한 내가 시간외 근무라 부르는 퇴근후의 식사나 만남의 자리에서 그는 매우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이 점이 매우 헛갈린다. 입사하자마자 나는 업무와는 동떨어진 전공에 경력 또한 아르바이트 몇 개월이 전부인 상태였으니 일을 가르쳐야 하는 사수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을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진이 나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나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고,

나를 가르쳐 보겠다고 애를 썼지만 전공도 전혀 다르고 경험도 전혀 없고 그저 낙하산을 커버할 작은 수상 경력 하나로 회사에 디밀고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아는 건 나와 우리 가족들. 그리고 대표이사인 외삼촌과 가족들 정도였다. 진은 분명히 나의 존재를 모르고 친절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진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이봐요, 진혜 씨. 무슨 헬렌 켈러예요?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엄연히 나의 상사이다. 아니 사수이다. 어제까지는 친절하며 인내심 있는 근사한 사수였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을 설리반쯤으로 이야기하다니.

  어린 시절 책은 너무 진부해 보여 요약본을 본 적이 있었다. 복합장애. 너무 어려운 상황 아닌가? 그런 사람을 가르치다니. 그 선생님 너무 대단한 거 아닌가?

  그렇다면 진은 자신을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야기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 복합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인가?


  -아까는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직장이니까 당연히 그러시는 게 맞죠.

  맞긴 뭘 맞나. 외삼촌 회사에 낙하산만 아니었어도 나는 이런 조선시대 대화는 사절인데. 게다가 사수가 진이 아니었다면 시간외 근무까지 (나의 표현임)  해 가면서 이딴 소리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의 이 관계는 뭐람. 직장 생활의 연장선상인가? 썸 타는 건가? 이런 지가 벌써 두어 달째이다. 내가 그동안은 적응하느라 바빠 이런 만남을 딱히 뭐라 지칭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사무실에서 그런 무안을 당하고 나니 나에게 처한 현실에 눈을 떴다. 결국은.


  나 보다 이 사람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웃겨. 그동안은 내가 회사에 적응하느라 이것저것 따져 보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거 너무 웃기는 거 아니야?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친절한 사수 코스프레를 하고 저녁에는 업무의 연장인지 친절의 연장인지, 썸을 타는 건지 알아채지도 못하게 정신없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나더러 헬렌켈러냐고?

  그동안은 내가 회사 일이 서투르다는 핑계로 그대로 당하고만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시간 외 근무 장소에서까지 당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오늘 낮에 들었다. 번쩍.

  다른 때와 다르게 나는 새침하게 커피를 앞에 두고 입을 다물었다. 나도 썸 정도는 탈 만큼 탔던 사람인데 오직, 회사 업무라는 이유로, 그리고 솔직히 마음이 있기도 해서 온갖 홀대도 견디며 참은 건데......

  그렇다고 진이 그렇게 나를 홀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한 번에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면 자신도 모르는 것 같은데 습관적으로 혀를 차며 다른 곳을 보는 몹쓸 버릇이 있어서 그렇게 느꼈다. 나도 이참에 명분이 하나 생겼으니 마음껏 꼬장을 한 번 부려봐야겠다. 나는 일부러 저녁에 만났음에도 업무적인 관계로 선을 긋기 위해 차만 마시겠다고 했다. 낮에 홧김에 정색을 하며 헬렌 켈러 운운했던 진이 당황했는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다. 나는 마주 앉은 진은 비스듬히 바라보기 위해 몸을 왼쪽으로 조금 돌려 앉았다. 등을 한껏 의자에 기댔다. 불편했지만 조금 거만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헬렌켈러는 너무 하신 언사 아니에요? 제가 헬렌켈러처럼 훌륭한 사람이란 뜻으로 말씀하신 건 아니신 거죠? 이전의 상태를 말씀하신 거죠?

  진이 조금 난처해하는 눈빛을 하더니 이내 자신이 너무 마음이 급한 나머지 말을 함부로 했다며 나와 헬렌켈러에게 함께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혹시나 했던 작은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사과를 받고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그런데 저... 진혜 씨한테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솔직히 말해 줄 수 있죠?

  뭐냐고 물어보라고 하는데 그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었다.

  -그런데 그 전국 단위의 공모전에서 받은 대상, 그거 진짜 진혜 씨가 한 거 맞아요? 혼자? 순전히 자기 힘으로?

  나는 솔직히 좀 기분이 나빴지만 헬렌켈러만큼은 아니었다. 의심할 만도 하겠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나의 2개월치 실력만 봤을 뿐이고, 내 공모전 작품은 3년 치 나의 노력과 수고가 고스란히 들어간 것이니 말이다.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제가 한 게 맞아요.

  진은 얼굴이 벌게졌다. 속마음을 들켜서겠지. 그동안은 내가 착한 신입 행세하며 일을 배워야 하기에 쥐 죽은 듯 지냈지만 이게 진짜 나라는 사람이거든. 할 수 없지. 실망스럽겠지만 진짜 내 모습인 걸 어쩌겠어.


  -진혜 씨, 아까 낮에 일 사과했지만 지금 수상 관련해서 물어본 것까지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남자가 왜 이렇게 사과가 헤픈 거지. 갑자기 매력이 급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젠틀하다.

  -배 고픈데 저녁 먹어요.

  -네에? 네.

  진이 오늘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다. 빙글빙글 돌겠지? 오늘 정신 한 번 잃어 봐야 다시는 그런 망언을 안 할 거다.


  스테이크를 먹을까 생선구이를 먹을까 하다가 생선구이로 정했다.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스테이크를 먹자고 했는데 그냥 생선을 먹는 게 오늘 같은 날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왠지 좋아하는 걸 날름 먹으면 너무 쉽게 사과를 받는 형식이 될까 봐서였다.

  저녁을 먹고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한 시간 있으면 문을 닫을 시간인데 실내에서 먹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딱히 갈 곳도 없고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고 허브티를 주문했다.

  뜨거운 허브티에 얼음 두 조각을 넣었다. 마시기 딱 좋은 따뜻함과 향긋함이 입 안을 감돌았다. 창밖을 보니 어둠이 짙게 드리워 산책로의 사람들도 모두 들어간 듯했다. 창에 비친 우리 테이블의 스탠드 불빛이 은은하니 예뻤다. 마치 큐피드의 화살이 스탠드에 맞은 것 같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탠드 불빛에 빨려 들어가듯 눈을 고정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늘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서로에게 막말을 할 때도. 헬렌켈러를 들먹일 때도. 한 번에 사과를 안 받아 줄 때도. 삶은 언제나 분명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저 스탠드 불빛이 오늘 밤 우리의 대화를 송두리째 먹어버릴 것이라는 예견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나는 이번에는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그를 응시하며 이름을 불렀다.

  -이진씨.

  -네?

  불멍 하다 놀라 자빠질 듯 나를 쳐다보는 그 남자. 낮에 나의 설리번 선생님이 되고자 했다면 나는 이 시간 너의 설리번이 될 것이다.

  -이런 내가 불편한가요?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전공자도 아니어서 제가 너무 불편하고 무능하게 여겨지세요?

  -아닙니다. 실은....

  실은... 뭐냐고. 빨리 말해. 그가 말하려고 입을 떼는데 종업원이 다가와 말했다.

  -문을 닫아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가게 문을 닫기 전에 진의 문이 굳게 닫히는 걸 눈앞에서 봐야 하다니. 나는 오늘도 계획의 십 분의 일도 실행하지 못하고 마음을 접었다. 고이고이. 내일은 성공할 수 있을까?

  스탠드 불빛을 원망스레 쳐다보며 주섬주섬 일어나는데 분명 스탠드가 웃은 것 같다.


 응답하라!

내일은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

#직장

#신입사원

  



이전 03화 평범한 일상, 그 사치스러운 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