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티 Mar 24. 2024

평범한 일상, 그 사치스러운 말

-동굴로 들어간 사람들 3-

그녀에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아니 철칙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대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타인을 이용해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절대 내가 남에게 이용을 당하거나 도움을 줄 수 없는 존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탁월한 눈을 지녔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예리한 그것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상대가 나에게 도움이 될지, 나에게 손해가 될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막힌 촉이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디에서도 절대 입을 떼지 않는다.

그 입은 자신이 뭔가 필요할 때만 연다.


언젠가는 동생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서는 당장 소풍 때 사진을 펼쳐 들고서는 인상착의만으로 가해자를 찾아낸 적도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이상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 건지.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동생이 남편과 어려운 일이 있다며 찾아왔다. 그녀는 단번에 알았다. 그동안은 동생의 남편인 제부가 꽤 괜찮은 회사의 영업이사로 있어서 자신에게도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가 끈 떨어진 연이라는 걸 직감했다. 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생은 언니 얼굴에 차마 침을 뱉지는 않았어도 침 비슷한 말을 뱉고 사라졌다.


넌, 나쁜 년이야. 평생 그렇게 살아봐라. 외롭다고 울긴 왜 울어.
그렇게 사니까 외롭지. 이제 나 찾지 마.


잠시 가슴이 쓰린 것 같았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그녀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은행앱을 켰다. 통장의 잔고를 들여다봤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깟 동생 없으면 어때. 마음만 먹으면 동네에서도 사람들을 실컷 사귈 수 있는데. 조금만 비위 맞추면 다 좋아하는데 왜 내가 널 도와줘야 돼? 나 힘들 땐 아무도 날 안 도와줬는데.'


언니와 연을 끊은 것도 벌써 3년이 넘어가는데 그나마 하나 남았던 동생과도 끈이 끊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 계산기는 빠르게 움직여 손익계산서 작성이 이미 끝이 났다. 


동생이 가고 난 자리를 얼른 치웠다. 자신에겐 언니든 동생이든 그저 인간관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어두웠던 지난 과거의 잔존물 같아 지워버리고 싶던 차에 잘 되었다 여겼다.


그녀의 남편이 정확히 6시가 되자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식적인 환영인사를 마치고 주방으로 달려가 밥상을 차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매우 순종적이고 유순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기 속을 굳이 꺼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죽는 날까지 아무도 그녀의 속마음을 모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의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모르게.

가끔 은행 앱을 열어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남편도 모르게.

쌓여가는 재산을 확인하는.

그런 일상이 사치스러운 거야?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야?


이제 그녀를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

함께 할 사람이 없다.

비밀의 방의 문은 오늘도 

안에서 굳게 잠겼다.


그게 사치스럽냐고 동생에게, 언니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입술도 굳게 잠갔다.


모든 것을 잠갔다. 

안에서 잠갔다.

이전 02화 호갱님, 깨어나셨습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