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티 Mar 10. 2024

동굴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Her.Her.Her Priject

  입춘이 지났다고 방심했나 보다. 어제는 봄바람이 뺨을 간질이던 게 분명했는데 오늘은 등골이 오싹하니

추위가 느껴졌다.

인간도 꼭 그랬는데... B형들은 다 똑같아.

ㅡ나? 왜?

  핸들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기껏 밥 사주고 바다 보여주겠다고 무리하며 운전하고 있는 나에게 한 말 맞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뒷좌석의 '한'도 나와 같은 B형 이어서 되물은 거였다. 그녀는 누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그 인간도 그랬다고.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내려서 바다 구경을 해야 하잖아. 근데 언니랑 똑같이 차로 한 바퀴 휙 돌고서는 "됐지?" 이러면 끝이야.

ㅡ아하. 말이 없길래. 나는 그냥 이렇게 차에서 보는 거 좋아하거든. 미안.

  황급히 사과하면서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조금 억울했다.

  듣는 순간 순둥순둥하기로 소문난 그녀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고는 공원으로 향하는 삼거리 앞에서 급히 직진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유난히 검었다. 처음 어린이집 부모 모임에서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게 피부가 검길래  간에 문제가 있나 생각했었다. 또래 아이 엄마들과는 달리 자기주장이 별로 없고 어느 장소. 어떤 사람들

과의 모임에서도 그녀는 물처럼 스며드는 사람이었다. 단지 너무 검은 얼굴을 볼 때마다 뭔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견학을 간 작년 봄날, 엄마들끼리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벚꽃이 만개한 대공원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밥 먹고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는데 대여섯 명 엄마들 사이에 물처럼 녹은 듯 있던 그녀가 대뜸 입을 열었다. 검은 얼굴에 빛나는 흰 치아만 보이는 것 같았다.

  ㅡ아이 아빠는 우리 결이 돌잔치 한 다음 날 갑자기 짐을 싸서 집을 나갔어.

  카페 창 밖엔 희고 붉은 벚꽃이 기분 좋게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달리 우리 테이블엔 그녀의 낯빛처럼 무겁고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드리워졌다.

  엄마들 모임의 분위기 메이커인 막내 온유 엄마가 분위기 반전을 꾀하려고 어줍잖은 농담을 던졌는데 더 난감한 분위기가 되었던 기억이 났다.  그날 어떻게 그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집에 왔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그날과 비슷한 데자뷔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나는 얼른 바다로 다시 방향을 바꾼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남편은 그렇게 집을 나가더니 절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생활의 어떤 부분도 책임지지 않으며 연락조차 끊었다고 했다. 간신히 연락이 닿아 5년 되던 해에 이혼을 하려고 연락했지만 이혼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언뜻언뜻 말할 때마다 그녀의 입이 한쪽으로 올라갔다.


  검은 얼굴은 피부색이 아니라 그 슬픔과 어두움의 반영 같은 거였다. 또래 엄마들보다 나이가 많은 나는 그날부터 그녀 챙기기 프로젝트에 돌입한 거 같다. 그녀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동생처럼 챙기고 함께 아이들과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니곤 했다. 그런데 작은 습관 하나 때문에 B형의 그 인간과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게 많이 억울했다. 그럼에도 나는 침착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함께 바다로 걸어갔다.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는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내가 사는 인천이 바다 때문에 춥다고 했다. 나는 추운 게 아니라 시원한 거라고 바로잡아 주었었는데 오늘 보니 추운 게 맞는 거 같다.


  만조인지 바다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가득 찬 바다가 내뿜는 파도에서 칼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건너편의 신도시를 바라보다가 낮게 날고 있는 갈매기를 발견했다.  그녀가 언제 준비해 왔는지 가방 안에서 XX깡 한 봉지를 꺼내서 뜯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껏 본 중에 제일 씩씩하고 힘차게 공중으로 XX깡을 날렸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갈매기들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추위도 잊었는지 로봇처럼 팔을 쭉 뻗어 XX깡을 던지는 동작을 반복했다. 마치 주위에 우리는 삭제된 듯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난히 그녀의 보라색 옷 소매가 추위도 잊은채 펄럭였다.

  과자 한 봉지를 다 던져주고서야 옆에서 입술이 파래서 떨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ㅡ이제 가요.

  그녀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것 같다. 우리 B형 여자 둘은 미처 현실 파악도 못하고 쭐래쭐래 그녀 뒤를 따랐다. 그녀에게 저런 면이 있었던가.


  주차된 차로 돌아왔는데 점심 먹고 무인판매대에서 고른 붉은색 손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셋이 같이 사서 누군건지 몰랐지만 이내 그녀의 가방이 벙싯하니 열려있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방 안을 살피더니 콧노래까지 불렀다.

ㅡ세상은 요지경~

  나이답지 않은 콧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그걸  알아듣는 나는 또 뭐람.  난 언니니까 알아 들을 수도 있지. 


  그녀가 웃는다.

  검은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가슴이 찌릿해 오도록 웃는다.

  그러면 됐다.

  그거면 됐다.

Her. Her. Her

허허허~


https://youtu.be/tbJX9f2MYPs?si=DGnYCS6FUYDxe8s5

#연재브런치북

#동굴속으로들어간사람들

#그녀의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