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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티 Apr 14. 2024

4시 44분의 퇴근통

-동굴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6-

  오늘은 무사히 칼퇴를 하려나 마음을 졸이며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5시 45분이었다. PC 자판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빼꼼히 들어 파티션 위로 사무실을 한 바퀴 빠르게 스캔했다. 다들 일에 열중해 있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웠다는 걸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건가? 앞에 앉은 재은의 파티션을 살짝 긁었다. 그녀는 예민한 사람이라 빨리 알아채는데 하필 외국 바이어와 통화 중인지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토니의 표정을 보니 그는 멍하니 PC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러니 맨날 제이든에게 구박을 받지, 일에 심취하지 않은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거였네. 토니에게 사내 메신저로 챗을 보냈다.

  -똑똑.

  그는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왜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떴다. 딴청 부린 걸 걸렸을까 봐 그러는 건지 표정이 웃겼다. 나는 휴대폰을 가리키며 톡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업무 다 끝남? 칼퇴 예정?

  -난 아까부터 할 일 없음. 칼퇴하고 싶지만 보스 눈치 보는 중. 오늘도 칼퇴 불발 느낌.

  클 났다.

  -찐은?

  나는 사실 일을 일찍 처리하고 오밤중에 애틀랜타에 있는 바이어와 상담이 있어서 칼퇴를 해야 함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더니 왜 칼퇴를 안 하냐며 토니는 턱으로 사수인 진을 가리키며 어서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내가 눈치도 볼 것이 며칠 전 컨테이너 선적 건에 문제가 생겨서 요 며칠 진이 그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골칫거리의 발단이 토니임에도 토니는 저렇게 해맑게 지내니…… 토니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독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앙아시아의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그쪽 어디서. 파견 근무를 하다 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 실정도 어둡고 문화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트러블이 좀 있다. 어느 한 편으로는 너무 순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융통성이 없으면서 너무 눈치가 없고 업무 파악이 느렸다. 근무에 적응 못한다고 욕 꽤나 먹었지만 나는 인간미 있고 예의 있는 사람이라 친하게 지냈다. 그는 나와 사수인 진이 둘 다 진을 쓰면 헛갈리니까 나의 영문 이름을 찐이라고 지으면 어떻겠냐고 말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찐이고 사수는 진이다.

  왼쪽에 앉은 진을 살폈다. 그는 책상에 코를 박고 서류를 검토 중인 듯했다. 내가 오늘 밤 퇴근 후에도 해외바이어와 상담을 하는 걸 모를 거다. 저거 해결하기 바빠서. 이럴 땐 왜 시간 외 근무로 쳐주지 않으면서 알아서 미리 끝내주지도 않는 건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외삼촌이 외국계 회사의 임원으로 있다가 차린 회사여서 직원들의 안전과 복지에 최선을 다하는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이런 디테일 한 고충을 모르는 게 가끔씩 복장이 터졌다. 남들은 다 제시간에 출근해서부터 정시 퇴근하는데 나는 왜 오밤중까지 일하는 모드란 말이냐.

  나도 모르게 입이 쭉 앞으로 나와 있었나 보다. 앞자리의 재은이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입을 집어넣으라며 짓궂게 놀렸다. 그녀도 대충 업무를 끝낸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2분 전 6시였다. 나는 슬슬 책상 위의 잡다한 필기도구며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핏 진 쪽을 봤다. 이젠 아예 파티션 너머로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알 게 뭐야. 나는 막내잖아. 커피 테이크아웃도 해 와, 자기들 귀찮아서 안 하는 야유회 진행계획까지 만들어, 오늘밤에 야근도 해야 해, 떳떳하게 퇴근 못 할 일이야? 생각이 거기 미치자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당당하게 PC를 껐다. 옆에 있던 또 하나의 노트북도 껐다. 이건 이따 밤에 써야 하니까 가방에 잘 챙겨 둬야 했다. 책상 위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서랍의 물티슈를 꺼내 한 번 닦아줬다. 사무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6시였다. 너무 기뻐 작게 신음을 냈다. 아무도 듣지 못했을 거다. 재은도 정리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토니와 우리 아랫것들은 모두 퇴근 준비를 마쳤다. 진은 요동도 하지 않고 있어서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오늘은 입사 3개월 차이니만큼 나도 용기를 내서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저 퇴근하겠습니다.

  -네, 수고했어요. 이따 밤에 미팅 있잖아. 어서 들어가요.

  엥? 진은 알고 있었어? 이렇게 쉬운 거였어? 이 말을 못 해서 눈치 보고 기다리고 머뭇거리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던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는데. 왜 당당하게 일 끝났는데 가겠다고 말을 못 했냐고. 지금 보니 아무도 나에게 남으라고 말하지 않은 거였는데.

  그동안의 쓸데없는 짓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수고했어. 이따 미팅 있잖아. 이 두 마디에. 나는 일어서다 말고 진을 다시 바라봤다. 세상에 저렇게 멋진 남자가 있을까. 진 뒤의 커다란 창에 4월의 태양이 넘어가고 있었다. 벌겋게.


  낙하산의 비애다. 퇴근 눈치 보느라 눈이 빠질 뻔 했다. 나 혼자 퇴근앓이. 나 혼자 퇴근통. 나는 그걸 퇴근통이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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