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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티 Apr 21. 2024

4시44분 (3)

-동굴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무심코 시간을 보니 또 4시 44분이다. 언젠가 모임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상해. 뭔가 있어. 어쩌다 시간을 보면 꼭 4시 44분이야. 무슨 계시같은 거 아닐까?

  그 때 웅성거리며 하나 둘씩 저마다 말했다.

  -어? 나도 그런데.

  -너도야? 나도 그래. 어머머 4시 44분이 특별한 시간인가봐

  그 때 2년 선배인 정우 선배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우리 모임에서 특별한 존재이다. 우리 모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런 그런 존재? 우리 또래의 가벼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넘사벽의 그런 선배였다.

하얀 깃이 가지런한 셔츠 위로 유난히 흰 피부와 오똑한 콧날이 그의 날카로운 지성을 돋보이게 했다.


  -맞아. 그럴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무수히 많은 시간들을 그렇게 보는데 4시 44분이라는 444라는 숫자가 특이해서 더 각인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나도 4시 44분은 특별히 기억이 되거든. 그보다 더 많이 본 시간이 있을텐데 말이야. 이를테면 점심 시간이라던가. 아침 기상 시간 같은.

  듣고 보니 또 그럴 듯 했다. 언제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체크해 주는 정우 선배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지난 달 내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후에 친구들로 부터 선배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중동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열사의 나라. 그곳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건설 현장의 관리자로 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 모임은 또 가볍고 시시껍절한 대화로 시간을 보낼 게 뻔했다. 가끔 선배의 한 마디로 인해 우리 모임은 진지하거나 깊이 있는 대화로 전환되며 처음 시작과 다르게 뭔가 뿌듯함을 안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산타클로스같은 정우 선배의 빈자리가 크겠다 싶었다.

  나의 가벼움을 채워 주는 유일한 시간 중의 하나가 모임에서 선배와의 진중한 대화의 시간이었는데 그 즐거움이 한동안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이젠 스스로 나의 가벼움을 채워나가야 하나.

  

 소파에 구겨진 종이처럼 있던 몸을 일으켜 책장 앞으로 갔다. 검지 손가락으로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또르르륵 한 번씩 훑었다. 이렇게 훑을 때 모든 내용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이런 거 나오겠지. 두번째 칸도 그렇게 손가락으로 또르르륵 하며 손톱 끝의 감각을 즐기는데 푹 들어간 곳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오, 오늘은 너로 정했어.

  책을 보니 어릴적 좋아하던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였다.

  이상하게 저 책을 그렇게 좋았다. 술술 읽히고 그렇지만 뭔가 인생의 굴곡진 사연과 과정이 사실적이어서 매력적이었다. 힘겹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필립이 마치 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중3때부터 수도 없이 봤다.

  손가락을 책 위로 넣어 앞으로 눕혀 꺼냈다. 혹시 모르니 마른 티슈로 먼지를 한 번 쓸어내고 화르르 왼손으로 책을 잡고 책을 부채처럼 펼쳐봤다. 아직 읽을 수 있을만큼 헐어있었다. 이번에 보면 꼭 버려야 겠다 생각하며 첫 장을 펼쳤다. 거기엔 오래전 소녀의 글씨체로 그렇게 써 있었다.

  -그래서, 너는 커서 뭐가 될래?

  그 질문 앞에 잠시 멍하니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나. 그로부터 15년쯤 지난 나는 그 때 생각한 뭐가 되어 있는 걸까?

  삼촌 회사에 낙하산 사원, 사수의 눈치를 하루에도 수백번 씩 보는 그런 말단, 그리고 끊임없이 쉬고 싶다 말 하지만 막상 쉬는 시간에 쉼을 갖지 못하는 만성피로환자, 금요일 밤이면 너무 설레어 잠 들기 아까워 날밤 까는 그런 사람, 회사에서 막내라고 커피 주문하면 겉으로는 웃지만 포인트나 쌓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평범함 막내.

  오늘도 나의 4시 44분은 그렇게 흘러가고 내일은 뭔가 다른 새로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그런 기대에 책을 덮고 책상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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