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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Aug 17. 2019

10. 실제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타쿠가 성장함에 따라 타쿠도 시간을 보낼만한 무언가가 필요하게 된다. 타쿠가 두발로 걷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타쿠의 활동 범위는 넓어진다. 타쿠는 주로 탐색 행위를 하며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다. 특히 움직이는 곤충이나 작은 동물, 물고기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개미를 손 위로 올려 보기도 하며 눌러서 죽이기도 한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물고기에게 줘 보기도 할 것이다. 우연히 물가에서 타쿠는 아빠가 이야기 해준 사나운 동물과 닮았은 돌멩이를 발견한다. 타쿠에게 이 돌멩이를 가지고 놀 새로운 방법이 생각났다. 다른 돌멩이는 타쿠가 되어 사나운 동물과 닮은 돌과 싸우는 역할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초기 역할 놀이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역할 놀이를 하고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타쿠는 상상력을 발휘해 아빠가 쓰는 돌도끼나 함정을 사용하기도 한다. 물가에서 타쿠는 진흙을 반죽하면 원하는 형태의 물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타쿠는 진흙으로 부모의 모습을 만들어 보기도 하며 곤충이나 본 적 있는 작은 동물의 모습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이전에 아빠가 이야기 해준 사나운 동물에 대해서도 만들어 본다. 타쿠가 성장할 때까지 진흙과 역할 놀이는 타쿠에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요한 놀이가 되며 타쿠의 발달에 많은 도움을 준다. 


 유인원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전두엽의 발달 정도에 있다. 전두엽은 인간의 운동과 생존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다른 뇌의 부분보다 늦게 발달을 시작한다. 운동과 감각, 균형에 관한 뇌, 심장과 호흡을 조절하는 뇌의 발달은 추론과 기억, 이성, 판단, 메타인지를 담당하는 전두엽에 비해 빠른 발달을 보인다. 전두엽은 3세경 발달이 빠르게 진행되며 청소년기 까지도 발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타쿠의 상상력은 현대인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질 터이다. 타쿠에게는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책도 없으며 문자도 없다. 타쿠는 동화책도 신화도, 이야기도 없는 제한된 환경에서 양육된다. 종교의 개념 역시 제한적이다. 타쿠와 그의 가족의 뇌는 상상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도구인 전두엽은 가졌으나 활용도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들이 상상하는 것은 몇 가지 애니미즘적 생각과 일차원 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추론 정도일 것이다. 타쿠는 그저 돌을 보며 동물을 생각하고 부모를 생각하는 정도의 추상적 사고만을 할 수 있다. 생기가 있는 자연을 보며 어떤 의지를 가진 존재를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그에 비하면 현대의 아이들은 축복받은 환경을 가졌다. 누구든지 도서관에서 검색 한 번에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빌려 읽을 수 있다. 그밖에 고대 중국과 아랍의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야기는 넘쳐 난다. 문자의 발명 이후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와 아이들을 위한 책이 가득하다. 부모가 노력한다면 쉽게 자녀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추상적 개념과 추론, 이성적 판단을 하는 전두엽을 발달시킬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법칙이 그러하듯 고귀한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지성의 영역이라고 하는 전두엽의 발달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뇌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게으른 본성은 전두엽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권태를 피하고자 상상력을 동원하기보다 가만히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길을 택하게 된다. 오늘날 TV와 유튜브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아주 쉽게 충족시킨다. 다양한 시각적 색채와 자극적인 내용으로 뇌를 권태로부터 구원한다. 이러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몇 번의 손가락의 움직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상상력이 배제된 즉각적인 자극들은 아이들의 전두엽을 발달시키는데 제한된다.   


 장난감 가게를 가보면 다양한 캐릭터들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자동차를 모으고 바비 인형을 모은다. 몇 가지 역할 놀이가 가능하지만 전두엽이 개입할 여지는 최소화된다. 장난감 회사는 다른 캐릭터의 비슷한 유형의 장난감을 시장에 쏟아낸다. 본질적으로 비슷한 장난감을 캐릭터가 다르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구매하고 그것들과 시간을 보낸다. 진흙 만들기에 몰입해서 형체를 만들어 내는 타쿠에 비하면 요즘 TV와 유튜브를 보는 아이들의 뇌는 꺼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도시는 자연에 비해 정적인 모습을 가진다. 콘크리트 바닥은 어떠한 탐색 욕구도 아이들에게 일으키지 않는다. 높이 지어진 건물들은 처음에는 신기할 수 있으나 곧장 관심 밖의 일이 된다. 자연은 도시와는 다르다. 초여름 작은 공원의 풍경은 온갖 이름 모를 벌레들과 풀로 가득하다. 개미는 벌레의 사체를 쉼 없이 운반하고 풀줄기는 진딧물과 무당벌레의 터전이다. 조금 더 큰 숲으로 들어가 보면 생태계는 더 복잡하다. 타쿠는 대자연의 환경에서 자라며 많은 것들을 보고 만지며 느꼈을 것이다. 자연은 천천히 변하기에 타쿠가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다. 그 속에서 타쿠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많은 것들을 느끼며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은 움직이는 물체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그것은 포식자일 수도 있고 사냥감일 수도 있다. 정적인 도시에 비해 자연은 이런 동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타쿠의 시대와 비교하면 아이들의 추상적 사고를 발달시키기에 현대의 부모가 가지는 선택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좋은 옵션보다는 편안한 선택을 선호한다. 일단 TV를 보여주면 아이들은 곧잘 얌전해지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숲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다시 공원으로, 숲으로 떠나고 있다. 도시에서 얌전하던 아이들도 숲으로 떠나면 탐험가가 된다. 갖가지 식물과 열매에 대해 관찰하고 나름의 추론을 한다. 작은 곤충들의 생태를 상상한다.  


 아이들은 탐색을 통해 인과관계를 깨우치며 놀이를 통해 추상적 개념들을 익혀 나간다. 추상적 사고 발달을 위해 부모는 최대한 날것의 재료를 주는 것이 이롭다. 이미 공장에서 만들어진 장난감은 아이의 소유욕을 만족시키지만 상상의 세계는 제한한다. 날것의 재료는 비싸지 않으며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 흙에 물을 부어주면 진흙이 되어 무엇이든 상상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무 블록이나 사람을 닮은 작은 돌멩이, 나뭇조각과 흙더미 들은 최고의 장난감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놀이할 또래의 친구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게으른 본성을 타고났기에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독서는 상상력의 뼈대를 제공한다. 소설 속의 강아지는 독자의 수만큼 다양한 강아지의 형태로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단순한 문장도 개인에 따라 수많은 상상력이 첨가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영상은 완성된 형태로 전달된다. 영화의 캐릭터는 모두에게 같은 캐릭터 한 명으로 존재한다. 책을 읽다가 생각할 것이 있으면 잠시 책을 덮고 사색에 잠길 수 있지만 영상을 보면 생각할 것이 생기기 전에 이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아이의 전두엽은 추상적인 그 무엇도 상상하지 않는다. 시각적인 만족과 스토리가 주는 감정을 통한 희열을 느끼기에 아이의 뇌는 바쁘다. 보다 차분하고 천천히 생각하는 시간은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 서적들 중 플라톤의 저작 '대화편'의 '국가'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제자들, 친한 사람들과 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토론을 하는 것이 큰 흐름이다. 정의라는 추상적인 실체를 명백히 밝히기 위해 불의한 것과 이상적인 사회 시스템 즉 이상적 국가에 대한 토론을 한다. 책의 마지막 즈음에는 죽음에 관한 것과 죽음 후의 이야기에 대한 이성적 추론도 첨가된다. 책을 읽으면 그 당시 사람들이 추상적 개념을 실체화하며 구분 짓고 분석하며 정의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토론과 사색을 통해 그들의 사고 능력을 지속적으로 단련하였기에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오늘날의 광고는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자극적이며 영화의 CG는 놀라운 정교함을 가졌다. 세상의 문화는 우리에게 더 이상 책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상상할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인은 인간이 동물과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전두엽을 발달시키는 방법을 점점 더 잃어 가고 있다. 성인의 주의 집중력이 10년 새 현저하게 줄었다는 이야기는 놀라운 견해가 아니다. 이러한 추세는 미디어와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어 우리의 자녀들은 생각하는 힘을 잃어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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