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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Aug 19. 2019

11. 가정을 넘어 세상으로

 자연은 풍요롭지 않지만 살아가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산물을 타쿠의 가족에게 제공했다. 도처의 동식물로부터 식량을 얻었으며 짐승의 뼈와 가죽은 추위를 피하고 몸을 지키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도구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돌을 깨거나 가는 행위를 통해 날카로움을 얻었고 가죽을 말리거나 두드려서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은 때로는 타쿠의 가족에게 시련을 주기도 했다. 겨울이면 불이 있음에도 추위에 고통스러워했으며 폭풍으로 물이 불어나 집이 무너질 때는 좌절감을 느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이 칠 때 그들은 두려움에 바짝 몸을 엎드렸다.

 

 ‘세계’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세계는 존재했다. 아담과 이브는 언어의 발견 이전부터 세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세계는 스스로에게 대한 인식, 즉 자아를 깨닫게 되는 순간 태어난다. 세상과 자기를 분리하게 되며 자아가 발생하며 자신 외부의 것들은 세계를 이룬다.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에서 존재를 구별해내는 행위이다. 타쿠가 아직 말을 못 하는 아이였을 때 가장 먼저 세계와 구별시킨 대상은 타쿠의 엄마인 이브였다. 이브는 타쿠에게 가장 먼저 인식된 존재이다. 사실 엄마에 대한 인식이 먼저인지 자아의 발견이 먼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엄마 다음은 아빠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마마 혹은 빠빠라는 명확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세상 모든 것에서 몇몇 특정 대상을 분리해내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타쿠가 성장함에 따라 세상은 점점 세분화되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다른 것과 구별되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초기 인식 대상은 주로 엄마, 아빠 같은 인물이다. 인물이 가지는 특성은 자아가 있고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경험적으로 인물 이외의 것에도 인식되는 것에 자아가 있다고 느낀다. 어른인 우리에게는 무생물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지만 아이는 무생물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스스로와 주로 인식하는 엄마, 아빠 모두 자아를 지닌 생명으로 아이의 입장에서는 인형이나 사물이 자아가 없다고 생각하기가 힘들 것이다. 특히 인형은 인간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어 다른 사물보다 더 자아가 있다고 느껴지게 된다. 그렇기에 원시 사회에서 무생물에게 자아를 부여하는 행위는 매우 자연스럽다. 대자연을 인격이 있는 존재로 여기는 정령에 대한 개념, 동물의 모습을 딴 신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비슷한 예가 된다. 


 타쿠의 가족은 무생물에게 인격 부여를 하며 세상 만물에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타쿠의 관심사는 자기 욕구에만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가족에 대한 관심으로 넓어지고, 곧 세상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타쿠의 가족에게 자연은 인격을 가졌기에 세상 은은 수직적인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인 구조라고 여겼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기는 수직적인 사고는 이 시대에 발생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의지를 가진 자연이 인간에게 먹을 것과 집, 의복을 제공하며 인간은 감히 자연을 남용하거나 파괴하지 못했다. 무생물은 의지를 가진 존재로 타쿠에게 인식된다. 자연은 지배하는 것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자연친화적인 세계관을 지녔을 것이다. 타쿠는 대자연을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도 하며 때론 천둥과 번개, 폭우로 벌을 내리는 존재로 느꼈다. 타쿠에게 교감할 수 있는 존재는 스스로와 부모, 자연 전체였다.  


 우리의 아이들은 타쿠의 시대와 크게 다르다. 아이들은 부모를 접하며 가까운 친인척들을 만나게 된다. 주변에는 수많은 무생물들이 존재하며 창밖에는 많은 타인들이 존재한다. 아이들은 인형이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장하며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연을 정복하여 세상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지위에 대해서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거리를 보면 땅 위의 아스팔트와 인조 건축물들이 가득하다. 동물들은 좁은 우리에 갇혀 인간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구경거리가 된다. 그들의 발톱은 더 이상 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으며 흥미의 대상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타쿠의 수평적인 세계관과는 다른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수직적인 세계관을 가진다. 이러한 세계관의 확장은 자연에 인격을 부여하지 않고 하나의 무생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타쿠와 현대 인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회와의 만남 

 타쿠의 몸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자 타쿠는 아빠처럼 짝을 찾아 자신의 가정을 가지고 싶어 했다. 사냥 실력이나 도구를 만드는 기술도 늙어가는 부모보다 더 나은 경지에 이르렀다. 타쿠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식량과 몇 가지 도구들을 챙겨 주거지를 나선다. 타쿠의 부모는 떠나는 타쿠를 잡았지만 타쿠의 의지는 확고했다. 타쿠는 부모와 슬픈 이별을 한 후 무작정 집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주거지가 없는 삶은 자연과 벗 삼아 사는 타쿠라 할지라도 고통스러웠다. 잠을 잘 때도 깊이 잠들 수 없었고 때론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해 굶주린 배를 쓰다듬기도 하며 발을 헛디뎌 몸에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제대로 된 길이 없었고 타쿠는 경험적으로 강을 따라가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강의 하류를 향해 이동했다.  


 몇 주간의 방랑 끝에 타쿠는 몇몇 사람들과 조우하게 된다. 불문율 조차 없던 시대이기에 습격당한다면 타쿠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단체로 사냥 중인 남성 그룹을 만났다면 타쿠의 운명은 그 부족의 문화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원시 문화에서 홀로 다니는 부랑자가 좋은 대우를 받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쿠는 여행 중 몇몇 개인으로 이루어진 남성들을 만나기는 했다. 타쿠의 신체적 조건과 반사신경이 좋아 상대편을 제압하고 몸동작을 통한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타쿠가 접촉한 인간을 살해하였는지, 제압 후 풀어주었는지는 모른다. 이는 개인의 성향과 개별 문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느덧 날이 추워졌다. 타쿠는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따뜻하고 좋은 자리에 임시 주거지를 만들고 식량을 모으기 시작했다. 겨울의 추위는 만만한 것이 아녔기에 타쿠도 겨울 중에 정처 없이 이동하기는 힘들었다. 타쿠는 무엇보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잘했는데 덩굴로 만든 노끈으로 원시적인 어망이나 작은 동물을 잡을 수 있는 덫을 만들 수 있었다. 덩굴을 노끈으로 만드는 기술은 타쿠의 엄마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을 물고기나 작은 동물을 잡을 수 있도록 구조화한 것이 타쿠였다. 타쿠는 이러한 도구를 통해 남들보다 더 쉽게 식량을 모을 수 있었고 잉여 자원이 발생하게 되었다. 잉여 식량은 잘 말려서 오랫동안 먹을 수 있도록 처리하고 가죽 또한 잘 다듬어 놓아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잘 준비했다. 


 타쿠가 다른 부족을 만난 것은 타쿠의 겨울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늑대를 모시는 부족이었는데 최근 타 부족과의 분쟁으로 성인 남성들이 많이 죽어 겨울을 나는데 필요한 식량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다. 임시 주거지와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 사냥터를 물색하던 타쿠는 도토리 따위를 채집하고 있던 젊은 여자를 발견했고 우선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타쿠는 타쿠의 아빠가 처음 만나서 했던 방법으로 젊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타쿠는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며 채집함 속에 있던 과일 몇 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거래를 제안하며 1일 뒤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몇 개의 단어를 배우기도 했다. 타쿠는 약속을 한 뒤 말린 고기와 몇 가지 과일, 창과 돌칼을 챙겼다. 


 다음날 그녀는 그녀 부족의 남자 두 명을 대동해서 나타났다. 남자 두 명은 그녀의 오빠들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안전을 위해 같이 온 것이었다. 첫날에 대화를 했기 때문에 다음날 갑자기 공격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많은 전사를 데리고 오지는 않았다. 타쿠는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비치고 그녀가 가져온 몇 가지 도구와 식량을 교환했다. 같이 온 전사는 식량의 상태가 양질이며 잡기 어려운 물고기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식량부족 사태였던 그들의 가족에 도움이 될 것을 알고 전사는 타쿠를 마을의 제사장에게 소개하기로 한다. 


 그 뒤 타쿠는 늑대 부족으로 편입되어 훌륭한 전사로 인정받아 아내를 얻고 몇 년 뒤 승승장구하여 부족장이 되게 된다. 타쿠의 시체는 오늘날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그가 훌륭한 건축물이나 글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당시 그가 지었던 집은 집 터조차 없어졌고 도구들은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좋은 유전자는 수많은 세대를 지나 오늘날 누군가의 몸안에서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타쿠는 짝을 찾고 싶어 했다. 그 종족 번식의 본능이 타쿠를 독립으로 이끌었다. 늑대 부족의 일원이 되어 타쿠가 위대한 업적을 세웠고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같은 인간이 있는 사회 내에서 타쿠는 그만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아내를 만나 자식들을 낳았으며 인정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다가 많은 자식들 앞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수 만년 전 어떤 인간의 삶이지만 사실 오늘날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로 나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일 것이다. 몇몇 뛰어난 인간은 어떤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거나 역사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기술은 필요하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몇 가지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러하다. 


1. 사회로 나갈 용기 

2.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는 노력

3.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 


1. 사회로 나갈 용기 

 이 능력의 시작은 부모로부터 일정 시간 떨어져 있으며 발생한다. 부모와 분리된 적 없던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일정 시간을 지내는 것에 대한 심각한 불안을 느낀다. 이것이 유아기에 나타나는 분리불안이다. 아이의 분리 불안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모와 떨어져 타인과 있어본 적이 없던 아이에게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부모와 함께 있으며 안전감을 획득하려는 아이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오히려 부모와 잘 떨어지는 아이가 있다면 애착의 문제를 암시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일찍 사회(어린이집)로 나간다. 인지가 충분하지 않을 때의 부모와의 분리에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하지만 지속적인 부모의 보살핌과 부모와 헤어져도 안전하다는 안전감이 생김에 따라 아이는 사회로 나가는 것을 일부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타쿠의 경우는 성인이 되어서 이러한 과정을 스스로 선택했기에 용기가 필요했었지만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분리의 과정이 커리큘럼처럼 당연시되고 있기에 명확히 말하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이들이 사회로 나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모두가 유치원이나 학교와 같은 기관에 가는 것이 당연시되어 있으며 이는 아이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항이 아니다. 처음 사회로 나아가는 시기에 관해서 명확한 사회학 연구는 없지만 애착 형성과 관련하여 여러 육아 서적에서 3세를 기준으로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라는 것은 생각보다 경험을 통해 빠르게 많은 것을 습득하고 적응하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 강제적인 사회 활동이어도 부모의 지지가 있다면 어떤 아이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아이들의 성격과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정도가 모두 다른 형태를 띤다. 그렇기에 나는 조기에 어린이집을 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지기보다 유화적인 헤어짐의 연습과 좋은 애착관계를 미리 형성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타쿠는 어른이 되어 가정에서 밖으로 떠나며 우리의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며 느끼는 그런 두려움을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타쿠에게는 강한 동기가 있고 변화를 원하는 의지가 있기에 사회로 한 발짝 내딛을 수 있었을 터이다. 이는 기존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때에도 적용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우리 또한 같은 세상 속의 다른 사회로 나가기 위해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터이다. 


2. 짝을 찾는 노력 

 이성을 유혹하는 능력은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낮게 평가되지만 나는 이를 모든 동물이 가지는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각 고유의 종, 개체마다 좋은 짝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공작은 수컷의 화려한 깃털로 좋은 수컷인지 평가한다. 공작의 사회에서는 화려한 깃털을 가지는 것이 유전자를 남기기 쉽기 때문에 점점 더 화려한 깃털을 가지는 개체수가 늘어날 것이다. 물론 화려한 깃털을 가지고 먹이활동을 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 유인원, 사자와 같이 사회성이 있는 동물에게서 좋은 수컷은 무리 내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수컷일 것이다. 우두머리 수컷은 다른 수컷과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스스로가 좋은 수컷임을 내세워 암컷들과 짝을 짓는다. 반대로 암컷은 수컷들의 경쟁에 이긴 암컷을 선택하면 되기에 비교적 다른 암컷과 경쟁할 필요가 적다. 인간에게서 남성들이 경쟁적으로 사회의 위를 향하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본성이 유전자에 내재적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이러한 성질을 강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남자는 좋은 짝을 얻기 위해 성공을 하고 돈을 벌려하는 성향을 본질적으로 타고난다고 할 수 있다. 여자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이거나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도 당연하다. 성공한 남자가 두 집 살림을 하거나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를 지속적으로 바꿔 만나는 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 같은 행위일지도 모른다. 법과 문화가 이를 탄압하는 것은 사회적 질서와 공익의 관점에서 어긋나며 현대 관습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타쿠도 분명 아버지와 같이 짝을 찾고 싶었을 터이다. 그를 위해 가보지 못한 곳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고 개인으로서 타부족과 접촉할 용기도 가지게 되었을 터이다. 타쿠가 안정을 버리고 모험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짝을 찾고 가정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를 찬양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원시적이고 동물적이라고 경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리고 싶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고 고귀하다고 주장한들 우리 속에 동물적인 본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동물적 본성을 이성으로 견디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인 것 또한 확실하다. 


 다른 관점에서 짝을 찾아 번식하는 행위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있어 문화가 없던 시기에 유일한 영생의 희망이다. 문화적 행위가 인간의 존재를 시간의 흐름을 일부 건너뛰어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긴 하지만 번식하는 행위를 통해 전해지는 생물의 유전자는 종이 유지되고 번성한다면 수 만년 이상 유지될 수 있다. 물론 긴 시간 동안 다른 유전자와 섞여 그 존재가 아주 희미해 질지라도 말이다. 짝을 찾는 것은 신성과 닿아 있다. 

 젊은이들이여 짝을 찾으러 떠나라.  


3. 공동체와 함께 한다.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의 단위는 가정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사회 안에서 인정받고 타인과 교류를 함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인간은 가정 외의 공동체라는 조직 안에서 안전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공동체에 대해 고민해 보면 선악의 유무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남미의 범죄조직, 마피아, 야쿠자 들은 일반적인 공동체보다 더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서로 보호해 줄 때도 있다. 공동체의 예시는 인류 문명 이전의 부족 사회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초기에 여러 가족이 모여 살던 부족의 형태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가정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시초였을 것이다. 역사와 함께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된 공동체는 오늘날 우리가 매우 복잡한 사회연결망을 가지게 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띄려고 하는 듯하다. 


 과거 사회의 특징이라면 나의 편과 적을 확실히 구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라의 국경으로 표시되기도 하고 지도에서 마을 단위로 구분되기 하거나 직업적, 종교적으로 구분되는 명확한 경계를 가졌다. 이전의 공동체는 우리의 몸과 바깥세상의 세균처럼 명확하게 구분이 지어져 누가 나의 공동체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오늘날은 옆집 이웃보다는 지구 반대편의 채식주의자가 나의 공동체일지도 모른다. 경계가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명확한 공동체를 가지기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며 이는 때로는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게 한다.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선 과거의 명확한 경계였던 국가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기존의 공동체 문화를 경험시켜 주는 것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좋은 선택이 될지, 그릇된 선택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했고 단체 안에서 안정감을 얻어왔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향의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고 본다. 유대감과 소속감을 인간이 포기하기란 아주 힘든 일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녀에게 공동체 활동을 다양하게 경험시켜 주고 싶다. 종교 단체나 서클 활동, 이웃과의 모임 등 다양한 형태를 띨 것이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과 더 가까우며 추후 내 딸이 성장하며 어떤 공동체와 함께할 것인지는 스스로 다시금 선택할 것이다. 


 원시 시대를 살았던 타쿠와 우리의 자녀가 살아가는 환경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타쿠와 우리의 본성 그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환경의 변화로 우리는 우리의 본질적인 필요보다 사회가 이야기하는 필요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는 우리의 본성과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 잊게 한다. 사회 안의 계층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 온 생애를 바치고 경쟁에서 타인을 배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을 선택하며 우리는 우리 안의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린다. 올바른 부모라면 우리 아이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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