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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Aug 28. 2019

15. 미래와 자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태초부터 현재까지 미래는 항상 베일에 싸여 있어 왔다. 미래에 대한 통찰력 있는 많은 책들은 오히려 미래가 이미 우리 손안에 있는 것 마냥 이야기한다. 작가들은 이미 평행 세계의 미래를 다녀온 듯 확실한 어조로 미래 우리의 모습과 미래를 대비하는 법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준다. 물론 현상은 인과의 법칙을 절대 피할 수 없다.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온 것은 단순히 50%의 확률이 아니라 동전을 던진 사람의 손에서 주어진 힘과 방향, 중력, 공기의 저항력, 원심력, 바닥과 부딪힐 때의 충격 등 수많은 원인의 총합의 결과로써 나타난다. 동전을 던지는 시점에 동전이 앞면이 나오는 것의 확률은 100%이다. 우리가 동전을 던지는 사람이 주는 힘과 방향, 원심력, 중력, 충격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더라도 갑작스러운 바람이나 누군가의 방해로 결과는 또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미래 예측은 일종의 신의 영역처럼 나에겐 보인다. 


 얼마 전에 읽은 돈에 관한 책에서 이야기하길 미국 증시에 대해 수 십 년의 분석과 결과를 토대로 주식 투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식의 내용을 법칙처럼 써 놓았다. 이전에 이러이러했으니 앞으로도 이러할 것이다 라는 추측은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세상을 조금만 더 면밀히 관찰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IBM은 컴퓨터의 광범위한 보금과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복사기가 나왔을 때 복사기 회사들도 세계적으로 수 천 대의 수요만 예측했을 뿐이다. 대공황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이 진정 투자자로서 필요한 덕목인가? 


 육아에서도 창의적이고 유머 있고 비판적인 사람으로 키우라는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10년, 20년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통 능력이 뛰어나고 디자인적 감각이 있는 사람으로 키우라는 이야기도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예측은 불가능하다. 예측에 성공한 새로운 기술은 더 이상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은 의도치 않게 발견된다. 누군가가 준 선물처럼 빛에서 레이저를 분리해 내는 기술이 발견되고 곰팡이에서 항생제가 발견되었다. 그 시대에 레이저가 우리에게 줄 기술적 이득과 항생제의 이득에 대해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발견자 조차 그러한 것들은 알 수 없었다. 첨단에서도 첨단 기술에서 기술이 계획에 의해 발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도체를 기술로서 보다 정밀하게 만드는 기술은 기술의 발전이지 전혀 다른 기술의 탄생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와 우리 자녀들은 어떠한 태도와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하나? 복권을 예측하듯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코딩이 유망하기에 초등학교 때부터 코딩 교육을 하는 것이 이러한 예가 될 수 있다. 미래에 자동 코딩 AI가 나타난 다면 코딩에 비중을 많이 둔 아이의 일자리는 보전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한 보다 값싸게 코딩을 해주는 제3세계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 자녀의 일자리는 또다시 위협받게 된다. 그렇기에 학교는 사회보다 보수적인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부모의 역할도 학교에서 시행하는 교육과 맞닿아 있다. 어떤 면에서는 둘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교육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으로 정의된다. 육아의 과정도 나는 독립된 인간으로서 삶을 누리기 위해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으로 본다. 교육이 보다 큰 카테고리며 육아는 작은 교육의 부분으로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교육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핵심적인 가치관과 기조는 학교의 교육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육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인간 그 자체는 수 천년 전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생물학적인 인간의 변화는 아주 서서히 진행되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 인간이 기계와 결합해 사이보그화 되지 않는 한 우리가 인간이라는 생물로서 가지는 그 본질은 미래에도 유지되어 갈 것이다. 아이는 세상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탐색한다. 아이는 실제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자라나며 기술을 익히며 어른이 되면 부모와 독립한다. 사회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으며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가정을 이루어 번식한다. 그리고 죽는다. 이러한 기조는 생물학적 인간의 본성으로 나는 본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왕정, 공화정 같은 이러한 다양한 정치체계가 사회를 이루었지만 그 어떤 사회체제도 이러한 기조를 벗어나지 않았다. 부모의 역할은 이러한 근본적 기조를 육아 목표의 중심으로 두고 상황에 맞추어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미래 사회에서 기술이 각의에 이름으로써 우리의 기본 삶의 기조 전체가 변할지도 모른다. 기술로서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면 현시대 우리를 이루는 대부분의 철학과 종교는 의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상황까지 염두에 둔다면 사실 인생 계획 그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된다. 


 추가적으로 우리의 자녀에게 전하고 싶은 덕목이 있다면 말랑말랑한 뇌다. 사회 전체가 빠르게 변한다면 개인도 변화에 맞출 수 밖에는 없다. 우직하고 단단한 뇌를 가진 사람은 변화에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고대 로마 제국이 말랑한 뇌를 가진 국가였다. 그들은 원로원, 민회, 집정관(1년 임기)을 두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시대에 따라 원로원의 힘이 강하기도 하고 민회의 힘이 강하기도 했다. 또한 타국의 좋은 문화를 재빨리 받아들여 특유의 로마화 과정을 거쳐 자신의 것들로 받아들인다. 다신교였던 로마가 유일신 신앙을 받아들인 사건을 보면 경악스럽다. 때론 강경하게 속주화 시키는 제국주의적 노선을 취하기도 하며 동맹국으로서 자치권을 지키고 천천히 로마화를 시도하는 온건적인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상황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다. 잘 정비된 제도 안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탄생한다. 스피키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라쿠스, 술라, 카이사르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끊임없이 권력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 불쑥불쑥 뛰쳐나온다. 그러한 인물들은 로마의 주역이 되어 국가의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 물론 로마 역시 흥망성쇠의 법칙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로마의 성장기와 완숙기를 보면 국가로서의 좋은 모델이 될 뿐 아니라 개인으로서도 배울 점들이 많다. 배울 점들은 가져와서 기존의 나와 융합하여 스스로를 잃지 않은 채로 새로운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말랑한 뇌를 가진 자의 장점이고 변화무쌍한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법이 된다.   


 이러한 자녀로 키우기 위해서 결국은 그동안 인류가 쌓아 둔 지혜를 배워둘 필요가 있다. 기초 과학, 역사, 문학, 철학은 인류 지혜의 보고이다. 놀라운 사실은 마을 근처 도서관에서 얼마든지 돈도 내지 않아도 이런 놀랍고 가치 있는 것들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사람들이 도서관을 보면 너무나 놀라워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창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 그동안 기초 물리학, 수학 분야에서 쌓아둔 인류의 지식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칙연산의 개념이 없는 시대에 아인슈타인이 태어난들 상대성 이론에 대해 생각이나 해볼 수 있었을까. 이것은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 문학, 법학, 의학을 포함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에 다 적용된다. 우리는 인류 문화의 어깨 위에 서서 쉽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의 보급과 정보의 수평화로 이러한 경향은 훨씬 심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정보의 풍요로운 사회에서 인간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생성되고 흘러넘치면서 우리는 어떤 것이 중요한 정보인지, 나에게 필요한지 알기 어려워졌다. 단순히 매체나 언론이 제공하는 것들을 보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선택지가 너무 많게 되면 선택 그 자체 행위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년에 셀 수 없는 양의 새로운 논문들이 많은 영역에서 쏟아져 나오며 수많은 책들이 새로이 출판된다. 오늘날 베스트셀러라고 인기 몰이를 하는 책 중에 100년 뒤의 사람들이 읽고 있을 책은 얼마나 될까. 인간의 사상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지침을 주는 책도 정보의 바닷속에서 깊은 해구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찾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보의 바닷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만 찾아내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개인의 역량을 키우고 자녀를 지혜의 숲으로 이끌기 위해 내가 제시하는 방법은 고전 읽기이다. 시간의 시험을 통과하여 현대인에게 조금씩이지만 아직도 읽히고 있는 책은 읽고 배울 가치가 있는 이야기 들이다. 인류가 세운 문화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훑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성경, 장자, 논어, 도덕경 같은 아주 고전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탐구한다면 그 안에서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자녀를 양육할 때 나는 이러한 지혜를 스스로 익힐 수 있을 만한 기반을 쌓아 두도록 교육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을 일상 속에 넣어 습관화시키고 호기심 있는 것은 깊고 넓게 탐색할 수 있도록 지식이 아닌 방법을 알려준다. 추상적인 것에 대해 상상하고 쉬운 말로 토론하고 질문한다. 서른이 넘어 내가 깨달았던 것을 20세가 되기 전에 자녀가 깨닫게 된다면 보다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연히 군의관 친구들과의 이야기 중 플라톤의 '국가'를 처음 읽게 되고 나는 수 천년 전의 철학자들에 대해 경외감을 품게 되었다. 그 뒤로 수많은 고전들을 읽고 생각했다. 어떤 책은 1달에 걸쳐 겨우 읽어낸 책도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나의 스승이 되고 장 자크 루소가 내 친구가 된다. 노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 모든 것의 연결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경이로운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저작 속에 수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고전은 생각의 깊이를 비약적으로 높여 주고 삶을 풍요롭게 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불안한 가족관계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같은 방식으로 가정을 꾸려 자녀에게 불행을 되물려 준다. 그 점이 너무나 나는 안타까웠다. 아직 인생에서 내가 쌓아 올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작은 가정을 이루고 더불어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나는 수신과 제가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영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실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글을 쓰기 시작했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내 사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흠잡을 곳도 많고 비판할 여지도 너무나 많다. 하지만 독자가 이 글을 읽고 한번 더 삶과 가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조그마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것이다. 


 우리의 자녀, 독자 역시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깨닫고 인간에 대해 깊이 통찰하며 기존의 아집에서 탈피하게 된다면 세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든 세상은 그대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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