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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태용 Aug 17. 2019

4. 너 자신을 알라.

기억이란 거울로 나를 본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고 점점 더 나아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마음의 병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신경정신과에서 정신 분석을 통해 수개월에서 수년간 치료를 받음에도 마음의 병이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인간의 마음은 치료하기도 힘들고 바꾸기도 힘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시작부터 막 다른 길에 몰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바꾸고 싶고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너 자신을 알라 

 먼 옛날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통해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임을 듣게 된다. 이를 듣고 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고 칭해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여러 주제를 가지고 토론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학자나 정치가, 기술자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며 진정한 지혜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 특히 현대인은 알지 못하는 것 속에 살면서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스마트폰의 원리를 모르지만 스마트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반도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디스플레이가 어떻게 빛을 발하고 터치를 인식하는지 많은 것들에 대해 무지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폰과 갤럭시의 차이점과 새로 나온 아이폰의 스펙에 대해선 마치 아이폰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아이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일부이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스스로에 대한 것은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주위의 인간관계를 통해 얻는 단편적인 나의 인상과 위치, 표층적인 기억들만을 가지고도 우리 스스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우리 안에 있는 어린 시절의 나와 가치관의 근본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경험을 통해 우리의 가치관과 자아를 만든다. 어린 시절의 우리를 안다는 것은 나의 자아와 가치관의 형성을 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몇 가지의 아주 단편적인 기억들만 있을 뿐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상처와 경험들은 안개 너머의 도시처럼 희미하게 윤곽만 보일 뿐이다. 


 딸이 4세가 되자 나에게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달라고 많이 졸라댔다. 나 역시 그동안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내가 내 어린 시절을 모른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중 기억나는 이야기가 초등학교 저학년 경 두 발 자전거를 연습하던 기억이었는데, 아버지가 자전거를 뒤에서 잡아 준다고 약속했지만 놓아 버려 논두렁에 떨어진 경험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두 발 자전거를 타는 시기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늦어졌다. 또 다른 기억으로는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변신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기억인데 당시 변신로봇이 집에 없던 나는 그 친구를 굉장히 부러워하고 시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스스로의 어린 시절의 경험에 집중할수록 내가 내 안에서 더 선명해지게 되었다. 


 내 아내는 뉴스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회면 뉴스는 꼭 챙겨보는 편이다. 특히 좋아하는 뉴스가 있다면 첫 번째로는 범죄와 관련된 뉴스이며 두 번째로는 사회 불평등에 관한 뉴스이다. 범죄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 지나치게 걱정하며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회 불평등에 관한 뉴스를 보면 그 누구보다 분개한다. 예전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의 엄마 같이 말이다. 범죄와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아내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에 저런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지 나는 항상 궁금해 하지만 아내 스스로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는 아내가 탐구해야 할 그녀의 과제이다. 아내는 왜 사회의 정의에 대해 관심이 많고 분노하는가?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한 첫 번째 단서 - 감정 


 우리 인간은 감정을 지닌다. 우리는 때론 분노하며 사랑에 빠지고 질투하며 슬퍼하며 우울하다. 감정의 발현은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는 정리한다. 


1.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감정 메커니즘 

2. 자라면서 경험에 의해 습득하는 감정 메커니즘 


 갓 태어난 아이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훨씬 강하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감정의 표현법을 가지고 태어난다.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거나 미움이나 무관심 같은 사회적 단절감을 느끼거나 하는 특정 상황, 즉 육체와 정서의 부족과 충만에서 오는 감정의 표현법을 우리는 가지고 태어난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울고 짜증 내며 사회적 단절감을 느낄 때 슬프다. 배가 부를 때 만족감을 느끼며 애정표현이나 스킨십을 통한 사회적 충족감에서 기쁨을 느낀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질적 모습 중 하나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부모에 의해 양육의 과정을 경험한다. 또한 사회와 접하기 시작하며 고유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그런 양육과 교육의 경험 속에서 아이는 새로운 감정의 메커니즘을 학습한다. 예를 들면 청결에 대한 감정은 문화에 의해 학습된다. 청결을 강조하는 문화적 배경에서 자란 아이는 더러움은 불쾌함을 유발하지만 청결에 대해 무관심한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라서도 더러움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고양이를 불길한 존재로 여기는 문화 속에서 고양이를 보면 무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문화적 배경 외에 개인의 경험에서 감정이 학습될 수 있다. 어릴 적 받은 학대나 유괴와 같은 큰 사건에서부터 자잘한 불평등의 경험들이 새로운 감정 발현의 메커니즘을 만든다. 


 인간이 혼자 산다면 이러한 감정의 발현은 아무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청결을 중요시하는 문화에서 자란 남자와 청결을 중요시하지 않는 문화에서 자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른 문화 속에서 학습된 감정의 메커니즘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감정을 유발해 감정적 충돌을 일으킨다. 그것을 우린 '부부싸움'이라고 한다. 같은 국가 내에서라도 가정의 문화 자체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 즉 학습된 감정의 메커니즘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다른 가정에서 만날 수록 감정의 충돌은 더 빈번해진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충돌이 스스로를 보게 만드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에게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서 내 감정 표현의 심층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감정의 발현과 표현(현상) 

--------------마음의 심층---------------- 

감정의 발현을 일으키는 경험(원인) 


 그렇기에 감정의 충돌인 부부싸움은 내 마음의 심층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유용한 장치가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속에 감정의 발현을 일으키는 경험을 발견할 수 있다. 부부싸움이 나를 알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부부가 부부싸움의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감정은 그렇기에 소중하다. 감정의 발현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중요한 도구인 동시에 나를 알게 해주는 가장 큰 단서가 된다. 감정의 격류에 항상 휩쓸리기만 해서는 절대 감정의 원류와 근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그 근본에 닿기 위해선 파도를 헤치고 역행해서 올라가 봐야 한다. 그것은 때론 이성이 필요하기도 하며 강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한 두 번째 단서 - 선택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선택을 해야만 하는 많은 상황을 마주한다. 점심을 뭐 먹을지에 대한 사소한 것부터 어떤 과를 전공으로 하는지, 어떤 배우자를 만날 지에 관한 중대한 결정 역시 선택을 통해 이뤄진다. 선택은 익숙한 것을 선호하기도 하고 가치판단의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항상 내가 이성적으로 원하는 것만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3일 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인 그는 그날 저녁 그는 친구와 술을 마실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할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이성은 공부를 하라고 말하지만 몸은 놀고 싶은 마음이 크다. 결국 그는 술을 마시는 선택을 하고 시험을 망쳤다. 


 실제로 이성적 사고는 선택의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좋은 도우미 역할을 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선택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난 가치판단의 합산이다. 이성과 감정, 육체의 필요와 충족, 익숙한 것의 선호와 같은 내부의 수많은 요소에 의해 합산되어 선택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 현재의 삶은 적분처럼 선택한 많은 순간들의 합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선택들은 우리 자신의 가치판단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선택들은 우리 자신을 이야기한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공부보다 술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면 그의 가치관은 육체적 쾌락과 친구와의 만남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보다 우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머리로는 그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감정과 이성 외에도 온갖 것들의 합산이다.  


a + b = 10 


이라는 등식이 있다. 우리는 a, b를 알 수 없다. a는 9, b는 1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경우의 수를 따지자면 무한대의 가짓수를 가진다. 10을 행동으로 나타나는 우리 선택의 결과로 생각해보자. 하나의 선택만 봐서는 결코 a와 b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또 다른 선택의 결과를 보자. 


2a + b = 14


다른 상황에서는 우리는 14라는 결과를 얻었다. 다른 상황에서 다른 결과가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의 결과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a가 4, b가 6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a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b를 감정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는 다양한 우리의 선택들을 상황에 맞춰 비교하며 우리의 이성과 감정의 정체를 보다 실체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이성과 감정이란 추상적 산물은 수학처럼 결코 딱 맞아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 역시 변해가는 존재이기에 과거의 선택만 보고 우리를 제단 하기는 불가능하다. 


 국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역사를 공부한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국가에서 일어난 다양한 선택을 시간의 순서에 맞게 배열했다. 시대에 맞게 선택한 사건들을 보며 우리는 그 국가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조선시대 역사를 배운다고 해서 현재 대한민국을 절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이 조선왕조실록을 공부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보다 심층적으로 알 수 있다. 개인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나의 역사인 선택들을 공부하면 현재의 나를 보다 깊게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의 선택들을 다시 한번 기억에서 꺼내 되짚어 보길 권고한다.  


 앞서 말한 감정과 선택이 전혀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감정의 발현으로 특정 선택이 일어나기에 둘은 반드시 연관되어 있다. 쉽게 표현한다면 감정과 이성의 합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보다 정확히 설명한다면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에고, 이드, 슈퍼에고를 통해 이야기해야지 감정과 이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기존의 학설과 대치된다. 하지만 나는 독자가 스스로에 대해 알기 원하지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에 위와 같은 글을 썼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너의 감정을 통해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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