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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수 Nov 14. 2024

픽션들(1)

무엇이 중요한가 / 움직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1. 

그림의 첫 시리즈를 그려내는 데에는 “무엇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2023년 9월 퇴사의 이유는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너무 보잘것없고 쓸모없다고 느끼며 오는 실체 없는 불안 때문이었기에, 무엇이든 손에 꼭 잡히는 것들을 그려내고 싶었다. 주제도, 소재도, 재료도 나처럼 남겨진 것들에 대한 것이었으면 했다.


내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상징들이 그림의 소재로 떠오른다. 바다와 조개껍데기, 알맹이만 쏙 골라먹고 남은 새우와 게의 껍질을 하얀 비닐봉지에 담은 모습, 어린 시절을 보낸 광안리의 바닷가와 민락동 수변공원에서 가족들과 까먹던 해산물과 그 껍데기들은 나로 하여금 비릿한 바다 냄새, 어리고 유치하고 시끄럽고 지루하면서도 사랑하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떠나고 싶었으나 항상 그리운 장소와 사물들, 감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유하며 떠다니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나를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그 기억과 감정을 평면과 공간에 담고 싶었다.



또한, 경증 우울증과 임포스터 신드롬*을 겪으면서 우연히 일상에서 목격한 것들에 큰 위안을 받았다. 첫 번째로는 음식을 준비하거나 먹으면서 남겨지고, 잘리고, 뜯기고, 버려지고, 부패해 가는 것들에 관한 것이었다. 음식은 내 살의 일부가 되고, 음식이 되지 못한 부분은 썩어가는 과정을 거쳐 다음 단계의 삶을 준비한다. 어느 하나 쓸모없지 않다는 점이 좋았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꺾꽂이**를 통한 식물의 생식이었다. 경이로웠다. 사람은 팔다리가 잘린다고 해서 다시 자라나지 않지만, 식물은 잘린 한 부분이 물과 햇빛과 바람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자기 속도에 맞춰 신경다발 같은 뿌리를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내리며 새로운 가지와 이파리를 펼쳐내고 있었다.


근원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개인적인 상징들, 음식이 되지 못한 남겨진 것들, 그리고 잘린 가지에서 뻗어나가는 뿌리는 첫 번째 그림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당시에는 홈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독성이 없는 재료들, 예컨대 수채화 물감, 흑연, 아크릴과 젯소 등을 이용해 남겨진 것들과 감정들을 묘사하고, 형태를 부수고, 묘사하고, 형태를 부수고, 다시 묘사하고 부수어내는 과정을 거쳐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기 위해 부서지고 사라지며 부유하는 나였다.


2. 

전 직장 동료인 루이제와는 과는 달랐지만 같은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동문이어서인지, 대기업 전시 디자인 외에 자신만의 디자인과 예술을 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인지 종종 점심시간에 님펜부르크 성의 카날을 산책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그때 루이제가 추천해 준 전시 공간을 운영하는 공동체는 뮌헨 중앙역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자리한 ‘노 디프레션 룸’이다. 대부분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꽤나 전문적으로 지자체의 펀딩을 받아가며 글을 쓰고, 옷을 만들고, 음악-무용의 융복합 프로젝트를 실행해 가는 사람들도 소속된 느슨한 모임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이 운영하는 전시 공간이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노디프레션룸에서 운영하는 비영리적 공간은 때로 오프 스페이스 갤러리****라고도 말한다. 이력이 없는 신진 작가의 경우, 신진 갤러리스트가 운영하는 공간들의 단체전 공모에 지원하거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문화예술공간의 프로젝트 제안서를 제출해 경력을 쌓곤 하는데, 이러한 공모는 누군가에게 심사받아 선정되어야 하므로 작가가 수동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프 스페이스 갤러리를 저렴한 가격에 대관하고 전시 구성을 직접 짜며 기획 의도에 맞는 작업을 해 스스로 홍보까지 하는 어려운 과정이지만 해볼 만한 전시는, 이때만 해볼 수 있는 실험과도 같다. 무엇보다도 지금 단계의 작가로서의 나는 움직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진 = 김지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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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포스터 신드롬(Imposter Syndrome): 임포스터 신드롬은 자신의 성과나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 성공이 실력이 아닌 운이나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주로 고성과자들이 느끼는 자기 의심과 불안으로, 성공을 이루었음에도 자신이 가짜(imposter)로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특징이 있다. Clance, P. R., & Imes, S. A. (1978). The Impostor Phenomenon in High Achieving Women: Dynamics and Therapeutic Intervention. Psychotherapy: Theory, Research & Practice, 15(3), 241–247; Cuddy, A. (2015). Presence: Bringing Your Boldest Self to Your Biggest Challenges. Little, Brown and Company.


**꺾꽂이: 꺾꽂이는 식물의 가지나 줄기를 잘라 흙이나 물에 꽂아 뿌리를 내리게 하는 식물 번식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잘린 식물의 일부가 독립된 개체로 성장하게 하며, 관엽식물과 다육식물 등의 번식에 자주 활용된다. 이 과정을 통해 식물은 새로운 뿌리와 잎을 형성하여 자가 번식이 가능해진다. Snyder, L. (2011). Propagation Handbook: Basic Techniques for Gardeners. Cool Springs Press; Toogood, A. (1999). Plant Propagation Made Easy. Hamlyn.


***바우하우스 바이마르(Bauhaus Weimar):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Weimar)에서 설립된 예술 학교로, 근대 건축과 디자인 교육의 혁신을 이끌었다. 이 학교는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지향하며 실용적 디자인을 중시하였고, 이후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다. 초기에는 건축가와 예술가, 장인이 함께 학문과 실무를 연구하며 새로운 교육 방식을 제시하였다. Droste, M. (1990). Bauhaus, 1919-1933. Taschen; Whitford, F. (1984). Bauhaus. Thames and Hudson.


****오프 스페이스 갤러리(Off-Space Gallery): 오프 스페이스 갤러리는 비영리 대안 전시 공간으로, 주로 신진 작가들이 전시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독립적 공간을 뜻한다. 상업적 목적이 아닌 예술 실험과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작가들이 갤러리를 직접 대관해 전시를 구성하고 홍보하는 형식을 취한다. Bishop, C. (2004).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110, 51-79; Finkelpearl, T. (2013). What We Made: Conversations on Art and Social Cooperation. Duk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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