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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Dec 14. 2021

구조요청 - 우리 고양이를 부탁할게…

무언의 신호를 읽는 일

아주 가끔.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훌쩍 떠나는 일일 수도 있고, 정말 소멸하는 일일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엔 그 경계에서 여러 인물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과거와 달라진 게 있다면 남겨진 것들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게 그런 감정들을 눌러주곤 한다. 사람이야 어떻게든 살면 되겠지, 살아가겠지 싶지만 유일한 특기가 먹고 자는 두 녀석들을 보면 '나 없으면 저 녀석들은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한 번은 굉장히 구체적으로 내가 없을 경우의 두 녀석들의 거취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덮쳐왔던 우울감이 자연스레 거둬졌다. 그리고 눈 앞에 놓여있는 털덩이를 조물조물 만졌다. '그래,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온기 있는 일이구나. 그것도 눈앞에, 손 닿을 거리에.'

우리집 CCTV들 1

찬과 두 털덩이는 나에게 자연스레 따뜻함을 건넸다. 옮아간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누군가를 계속해서 챙기고 어떤 시그널을 보내는지 눈여겨보는 행위들은 에너지와 피로함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반대로 녀석들에게 받은 것이 많다. 말하지 않아도 읽어내는 능력과 조건없는 애정 같은 것들이랄까... (언젠가 이걸 주제로 길게 풀어내려고 한다.) 녀석들이 보내는 시그널을 무시하다 보면 나중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푸코의 눈 찡그림에 적당히 대처한 덕에 푸코는 한 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봐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루종일 소음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녀석들과 조용히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일은 꽤나 깊은 평화를 선사한다.

우리집 CCTV 2

얼마 전, 한 친구에게 시그널을 받았다.


사실 이전부터 그가 시그널을 계속 보냈다는 걸 안다. '나 너무 힘들고 외로워.'라는.

그리고 나는 외면했었다. 내 삶도 마냥 충만하지 않았고, 많은 것을 물질과 숫자로 치환하는 그가 나는 불편하기도 했다. 때론 그 시그널을 잘라내기도 하고,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눈과 귀를 차단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거대한 최후의 시그널을 보냈다. 자존감 대신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나는 힘들다.'는 말 대신 '나의 고양이를 부탁한다.'라고 마지막 연락에서 조차 그다운 연락을 취했다. 푸코와 두부, 찬이 길러준 능력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그널을 또 한 번 외면했을 테다. 하지만 그의 문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겉옷을 입고, 다른 친구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났다. 경찰, 응급대원과 나를 지나쳐 잔뜩 긴장한 그의 회색 고양이가 제 집으로 도망갔다.

레이. 그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그는, 코로나 사태 이후 인력 부족으로 인해 유독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뉴스에서만 보던 의료진들의 희생 같은 거랄까... 한 페이지 남짓의 활자로 의료진의 고생을 희생과 의료 정신으로 포장하기에 친구를 통해 마주한 실체는 너무 곤혹스럽고 비참했다. 코로나로 바뀐 일상에 대해 불평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고 한심해지는 순간이였다. 위드 코로나 아래 계획된 연말 모임들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 있을까.


그는 이 모든 사태를 직장과 가족에게 알렸다. 그와 우리 모두 안다. 이 모든 사태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란 것을. 물론 일과 업무만이 그를 무너뜨린 건 아니였다. 울타리 역할을 하던 가족이 방아쇠를 당겼다. 답장 없는 일방적인 애정,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그의 가족에 대한 애정은 결국 그를 지치게 했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무리 치이고 상처 입어도 어느 것이든 단단히 마음 둘 곳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작은 동앗줄 하나를 잡고 버티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들로 그는 생의 허들에서 신호를 보냈다. 일상을 어느 정도 회복한 그는 이야기했다.

‘너희가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새삼 생을 마감하는 일이 얼마나 남겨진 이들에게 잔인한 일인지 우리는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 찬이 ‘내가 두부를 살린 게 아니라 두부가 날 살렸어.’ 라고 던졌던 말들이 떠오르는 어느날. 시그널을 보내고 받는 것. 푸코와 내가, 두부와 내가, 그리고 둘러싸인 모두가 서로 시그널을 주고받는 일에 감사하다. 우리 자연스레 사라지자.



덧_ 못생긴 나의 CCTV1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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