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단으로, 나의 템포로

내 리듬에 상대방을 끌어들이세요!

by 윤끼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 하던 일을 다 던져놓고 복싱장으로 향한다. 적어도 샌드백 치는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다. 미뤄둔 생각을 다시 꺼내야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볼 일이다. 그날도 그런 이유 덕에 복싱장으로 향했다.

또래 친구들은 자기 길대로 뚜벅뚜벅 잘 걸어가고 있는 느낌 속에 나 혼자 뒤쳐져 있는 것 같다는 많은 복잡한 생각이 스멀스멀 나를 지배했다. 타인과 비교하는 게 얼마나 소모적인지 알면서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나는 왜 저들처럼 저렇게 하지 못할까?' 하는 무의미한 고민들. 생각을 거둬내고자 복싱장을 갔다.


처음 복싱을 등록하면 원-투 와 앞 뒤 스텝을 한동안 배운다. 대부분의 운동이 그러하지만, 복싱 역시 리듬감이 꽤 중요한 운동이다. (그래서 뮤직 복싱이 탄생한 것인가?!) 훅과 잽을 날리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방의 속도감에 말리기 때문이다. 상대를 많이 치거나, 혹은 상대에게 최대한 적게 맞거나 이기 때문에 상대의 팔과 어깨 근육,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인다.


자연스레 상대가 빠르게 주먹을 뻗으면 빠르게 내 손으로 방어를 해야 한다. 처음엔 내 호흡에 맞게 움직이던 스텝들이 점차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게 보인다. 축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팔들도 행사장 풍선인형마냥 허우적 대고 있다. 복싱 '경기'라기보단 상대의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기 위한 허우적거림.


늘 헤매는 건 내 쪽..


오늘도 어김없이, 관장님의 속도를 방어하느라 자세가 엉망이 됐다. 심지어 스텝이 꼬여서 축이 무너지는 바람에 상대방 쪽으로 몸이 기울어져 버렸다.


'본인의 리듬을 찾으세요.'


나의 허우적 거림과 헐떡거림을 상대해주시던 관장님이 던진 한마디.


'상대방 속도에 맞춰 가다 보면 안 돼요. 본인의 속도감을 찾고 그걸 3분 동안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었다. 복싱을 하러 오기 전 머리에 맴돌던 말들에게 던진 한마디 같았다. 내 리듬을 찾고, 상대가 내 리듬에 맞춰가게 하는 것. 호흡을 가다듬고 스텝을 다시 정비하고 정신을 차려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리가 맑아진다는 것을 느끼고 한껏 유쾌하게 스텝을 뛴다. 삶과 운동이 하나가 된 담백한 이가 던질 수 있는 말이었다. 위로 아닌 위로를 안고 미트 후 홀로 샌드백을 쳤다. 샌드백을 치는 내내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온다.


"스무 살이 되면 대학을 가야지./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지. / 그렇게 시간이 많은데 뭐라도 해야지./ 30대 언저리가 되면 결혼을 해야지./ 결혼을 했으면 아이도 낳아야지."

같은 말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이 사회에 살다 보니 나를 조금씩 보이지 않게 누르고 있다. 사람마다 속도가 다른데 마치 하나의 속도로만 달려가야 할 것 같은 이곳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점점 증명해야 하는 나이가 가까워지니 그 피로감이 배가 된다.


관장님의 내 속도에 상대방을 끌어드리라는 말에 조금은 위안을 얻고 다시 내 스텝과 속도대로 샌드백을 친다. 선수들은 수없이 무의미해 보이는 스텝을 밝고 훕과 잽을 날린다. 그중 하나만 카운터 펀치로 맞으면 된다. 나의 템포에 타인들이 함께 뛰기를 바라며 내 리듬감을 찾아간다.


사는 게 뭐 있나!

두부와 준비운동을 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