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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아버지가 울던 바다

엄마와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10대 소년이던 할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간 일본 탄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어린 소년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야쿠자가 되고 숱한 고생 끝에 온천을 운영하면서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나의 아버지는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에 입학하면 자동차를 사준다는 고모의 제안에 열심히 공부해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단다. 하지만 졸업을 못한 채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에 갔다.

1960년대 말, 할머니는 ‘북한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주의’사회’라고 주창하는 조총련의 선전에 환상을 품고 조선에 갈 것을 희망했다. 대학생이던 아버지는 북한의 집단주의를 거부하며 할머니와 대립각을 세우다 집을 나왔다. 맏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할머니는 5남매를 데리고 북한으로 먼저 떠나가고 할아버지는 북한에 안 간다고 집 나간 큰 아들을 기어이 찾아내 북으로 끌고 갔다. 어려서 고아가 된 할아버지는 자식만큼은 절대 고아 만들지 않을 거라며 도망간 큰아들을 붙잡아 북송선에 오른 것을 평생 후회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공장의 기사장(기술 책임자)이 설계도면을 들고 자주 우리 집을 찾아왔다. 1980년대,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에는 도면을 보고 부품을 깎을 수 있는 기술자가 아버지밖에 없다고 했다.

군 병원 의사도 찾아왔다. 아버지를 형님이라 부르던 의사는 외국어로 된 의학사전을 들고 찾아와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동네 사람들은 고장 난 물건을 가져왔고 시계, 자전거, 자동차까지 아버지 손을 거치면 못 고치는 물건이 없었다.

어린 나는 그런 아버지가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북한은 아버지의 지식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남자라면 노동당에 입당해야 한다는 압박에 제출한 입당원서는 매번 탈락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북한은 남자가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면 ‘사내’ 축에 끼지 못한다고 하대했다.

당신이 노동당에 입당 못하는 이유가 ‘귀국자’ 신분의 ‘지식인’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절규했다. 그랬다. 북한 정부는 자본주의 물을 먹은 인텔리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사시 국가를 배신할 적색분자로 낙인찍고 관리 감독했다.  

그런 현실을 멀쩡한 정신으로는 감내하기 힘들었을까. 아버지는 삶에 의욕을 잃고 술을 마셨다.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삼킬 때까지 책임감 없는 술에 의존하고 죄 없는 술에 분풀이하고 감정 없는 술에 하소연을 했다. 술에 절여진 장기가 망가지고 고혈압, 뇌졸중, 간경화, 위궤양, 담석·담낭, 무릎 관절염, 치질 등 병명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아버지를 가리켜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안쓰러워했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는 스스로 망가져가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고 미웠다.

나는 가끔 바다에 간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가 울던 바다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긴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가도 가도 이 길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말끝에는 황량한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아버지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중에 왜 이 말이 각인되어 있는 걸까.

남한에 온 이후, 나는 낯선 사회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짓눌려 허적거릴 때에야 젊은 날 아버지의 한숨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이 열린(자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아버지가 느꼈을 불안은 닫힌(빼앗긴) 것에 대한 절망이었으니 나보다는 몇 배 더 힘겨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답답할 때마다 바다에 갔다. 집에서 바다까지는 10리 길이었다. 그는 바다와 구름과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바다 끝이 보이는 데로 계속 가면 아버지 고향이 나온다~”

긴 한숨처럼 내뱉은 목소리가 유난히 축축했다. 그 말속에 얼마나 많은 원망과 미움과 그리움이 배어있는지 그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20년 뒤, 나는 고향 바다를 닮은 속초 바닷가에서 ‘엄마~! 아부지~!’ 목 놓아 부르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동해바다로 간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가 울던 바다가 있다.

내가 부모가 되고 고향에 갈 수 없는 기구한 운명 앞에 서고 난 후에야 나는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고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 내 곁에 없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없는 바닷가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내 나이 40대 후반이다.


고향을 떠나오기 전 아버지의 소원은 “쌀밥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는 것”이라 하셨다. 그 보잘것없는 소원 하나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가셨다.


https://youtu.be/VZZX7sN-72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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