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샘 Nov 11. 2019

나의 살던 고향은...

우리 집은 하모니카사택의 끝집이었다. '하모니카 사택'은 한 동에 8세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이 하모니카 구멍을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할아버지 환갑잔치 날이었다. 그날 할머니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삼촌, 고모, 사촌들 온 가족이 모였다. 잔칫날이라 모두는 배가 불렀고 어른(남자)들은 술 한 잔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친척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엄마 차례가 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노래 부르던 엄마 눈에 눈물이 흘렸다. 조금 전까지 흥겹던 집안 분위기가 다운되고 어른들은 모두 갈 수 없는 고향의 봄에 젖어들었다. 할아버지 고향은 경상도 대구요, 6남매와 며느리 사위 모두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들이었다.

엄마의 18번은 ‘고향의 봄’이었다. 엄마는 고향의 봄을 부를 때마다 목이 메어 눈물을 훔치면서도 그 노래를 좋아했다. 어린 나는 엄마를 울리는 고향노래가 싫었다.


10살 쯤, 엄마가 시장에서 사온 신발은 장사꾼이 팔다 남은 한쪽만 2개인 신발이었다. 그 신을 신고 친구앞에 서는 것이 창피해 다리를 ×자로 꼬고  고개를 숙여야만했다.


1980년 즈음부터 연말과 연 초가 되면 정전되는 날이 잦았다. 저녁밥을 먹은 후 정전이 되면 우리 삼 남매는 서로 엄마의 양팔을 빼앗아 베고 누워 옛말을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어릴 적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엄마의 아버지)가 소작농으로 일한 품삯으로 찰떡을 얻어오던 이야기, 유치원 소풍에 도시락을 싸가지 못한 제자(엄마)에게 도시락을 몰래 건네주던 선생님 이야기, 조센징이라 놀리는 일본 사람 골탕 먹이려고 마늘을 잔뜩 먹고 통학기차를 타던 이야기...

엄마의 옛말 속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동산에서 뒹굴던 어린 소녀가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주인공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엄마는 ‘조센징’이라 불리던 재일조선인으로 매일 밤 고향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에게 고향은 가고싶으나 갈 수 없는 그리움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는 엄마처럼 고향에 갈 수 없는 ‘탈북자’가 되었다. 엄마가 부르던 고향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었고 엄마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었다.


하나원을 나와 받은 임대주택에서 혼자 자기 싫은 어린 딸이 내 목을 끌어안으며 “엄마 이야기해줘.” 한다. 나는 엄마 팔에 누워 상상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리며 나의 옛이야기를 시작한다.

엄마는 동해 바다가 있는 추운 지방에서 태어났어. 겨울이면 엄마 키만큼이나 많은 눈이 내려 쌓이고 아이들은 눈 덮인 산 위에서 스키를 타고 스케이트도 탔어. 여름이면 개울에 가서 쫑 개미(미꾸라지)를 잡아 신발에 담아 놀고 바다에 가서 수영을 했어. 파도가 치는 백사장에서 발바닥을 비비면 주먹만 한 조개가 걸려들고 갯바위에서 손바닥 만 한 돌 섭을 따다가 어죽을 끓여먹기도 했지. 짭짜름한 바다 맛이 나는 어죽이 아직도 입 안에 가득한 것 같아. 우리 집은 하모니카 사택이었어. 하모니카 사택이 뭐냐고? 생긴 모양이 하모니카 구멍처럼 다닥다닥 붙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팔을 베고 누운 딸이 쌕쌕 잠이 든다.

‘이 아이는 나처럼, 나의 엄마처럼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울지 않기를...’


 나에게, 나의 부모와 그 부모에게 ‘고향’은 그리움이다. 이루지 못한, 이룰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이다.
엄마는 일본의 후쿠오카, 나는 북한의 함북 경성, 딸은 중국 길림, 세 여자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다른 성을 가진 한 민족의 여성으로 태어나고 자라났다.  

이전 02화 아버지가 울던 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