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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엄마가 나를 믿는다고 했어

갓 성인, 사회인이 되던 즈음이었다. ‘학생’ ‘아이’로 불리다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들이었다.

조숙한 친구들 중에는 엄마의 화장품으로 허옇게 분칠을 하고 어른흉내를 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또래들보다 발육이나 성장이 늦되었다.


낮잠을 자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친구 엄마의 말소리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엄마들의 수다란 게 거의 비슷해서 남편 흉을 보다가 속 썩이는 자식 푸념으로 이어지고 저녁 끼니 걱정하다 흩어지곤 한다.

그날은 친구 엄마가 대학 가는 딸 자랑을 한참 늘여놓았다. 엄마는 공부 잘하는 딸 둬서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나는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누워있었다. 낮잠의 노곤함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는 대학 가는 친구에 비교되게 낮잠이나 퍼질러 자는 꼴을 맨 정신으로 들키기 싫었다. 친구의 자랑을 한참 들어주던 엄마가 딸이 비교당하는 게 싫었는지 스스로를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큰 딸을 믿소. 집에 큰일이 생기면 그래도 큰 게 제일 미덥고 의지가 됩데.”

그 순간 나는 다시 꿈속으로 빠져드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엄마가 나를 믿는다고? 내가 의지 된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내가 아직 꿈속에 있는 건가?


나는 3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2살 터울로 있다. 남동생은 학교 밴드부 주장으로 여자 팬들을 몰고 다녔고 막내 동생은 소프트볼 운동부 주장으로 전국체전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잘나가는 동생들에 비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있는 듯 없는 듯 미미한 그런 존재였다. 나는 엄마 아버지의 자랑이 되는 동생들이 부러웠다.


1살 차이인 아버지와 엄마는 먹고사는 문제로 동네 시끄럽게 싸우는 날이 많았다. 부부싸움이 절정에 치달을 때면 엄마가 이혼하겠다며 울고 아버지도 지지 않고 이혼할 테면 하자고 약을 올렸다. 슬픈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이혼하자’는 말이 나오면 엄마는 아들 이름을 부르며 보따리 싸는 시늉을 했고 아버지는 막내를 끌어안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아버지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나는 할머니 집으로 달려가 슬프게 울었다.


‘큰 딸을 믿는다’는 엄마의 말이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또 있었다. 엄마가 감자 농사지으러 가거나 석탄 주우러 갈 때마다 나는 엄마를 도울 생각보다 오만가지 핑계를 대며 도망 다니던 못난 딸이었다. 밥 먹고 설거지는 왜 나만 시키느냐고 투정 부리는 건 다반사였다. 이런 못나고 이기적인 딸을 엄마가 믿는다고?

친구 엄마가 돌아가고도 한참을 나는 엄마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눈을 뜨지 못했다.


‘엄마가 나를 믿는다고 했어.’

‘엄마가 나를 믿는다고 했어.’

탈북을 하고 인생에 큰 고비를 맞을 때마다 나는 엄마가 했던 이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엄마의 조건 없는 신뢰에 부흥하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어준다.


엄마가 된 지금은 딸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딸아, 너는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예뻐. 엄마는 무조건 네 편이고 너의 꿈을 응원해.”


‘사랑해’ ‘너를 믿어’라는 말은 많이 들을수록 힘이 되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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