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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어긋난 풋사랑

가을 하늘에 곱게 피는 들국화를 보면 농촌동원가던 날, 이 꽃 한송이 꺾어 건네던 그 아이가 생각나 가슴이 설렌다.


17살, 중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당시 북한은 11년제 의무교육(유치원 1년, 인민학교(초등학교) 4년, 중학교 6년)제도였고 남자학교와 여자학교가 분리되어있었다. 나는 10년 동안 여학교에서 여학생들과만 공부하고 뛰어놀았다. 남학생과 공부하거나 대화를 해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중학교 마지막 6학년에 올라가는 개학날이었다. 학교에서 남녀혼합교육을 실시한다는 지시가 전달되고 학교 안은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다. 사전통지나 소문도 전혀 없던 터라 학생들이 받는 충격은 매우 컸다. 이름이 불리는 순서대로 반이 정해지고 반 전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이 결정되기도 했다. 그날, 선생 학생 할 것 없이 우왕좌왕 낯설음에 방황하며 전쟁이 나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북한은 인민학교 1학년에서 반이 정해지면 졸업 때까지 학년마다 반 배정을 새로 하지 않고 10년 동안 같은 반으로 졸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담임도 웬만해선 바뀌지 않았다. 그 규정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고 여자만 득실거리던 교실에 시커먼 사내들이 침범하고 남자 어른 목소리가 바로 옆자리에서 들리는 기분은 낯설고 불쾌했다. 당시 우리 모두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여학생들만 가르쳐온 교사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여학교 교사들은 남학생 다르기 버겁다 하고 남학교 교사들도 여학생은 유리알처럼 조심스럽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이름은 6학년 2반에 있었다. 첫 수업이 시작되고 담임은 남녀 학생은 ‘동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습니다’로 존칭을 쓰라고 지시했다. 우리 모두는 큰 고민에 빠졌다. ‘동무’ ‘습니다’는 호상 비판할 때나 공적인 자리에서나 쓰는 존칭일 뿐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불편한 단어이다. 그런데 담임이 지시했으니 어길 수는 없고 따르자니 어색하고 불편했다.

옆 반인 6학년 3반은 첫날부터 호칭·존칭 따위 무시하고 평시대로 ‘야’ ‘다’로 합의했다. 하지만 1반과 2반에는 어색한 기류만 맴돌았다. ‘동무’ ‘습니다’를 쓰려니 낯간지럽고 ‘야’ ‘다’ 하려니 선생님이 무서웠다. 우리는 차라리 서로 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득이하게 말을 해야 한다면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본론만 전달했다.

‘저기...’ ‘이거...’ ‘했으면...’ ‘하지 말지...’

몇 주가 지나도록 교실 안은 서먹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35년간 여학생만 가르쳐온 담임은 출석부를 펼쳐 남학생의 이름과 얼굴을 번갈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불편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교실 안에는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밀고 당기는 기류가 흐르고 묘연의 눈빛과 감정들이 오고 갔다. 하룻밤이 지나면 ‘쟤랑 쟤 좋아한대.’ ‘걔가 고백했다가 차였대.’ 발 없는 소문이 교실 창을 넘어가고 전교에 소문이 퍼져갔다. 학교는 ‘이성 간의 끌림’을 ‘수정주의 날라리 죄’로 정의하고 단속을 강화했다. 연애하다 걸리는 학생은 학교 교단에 세워 사상투쟁을 벌이고 전교생 앞에서 창피를 주는 것으로 벌을 주었다. 하지만 사춘기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이성에 대한 끌림이 벌을 받는다고 막아지겠는가. 


새로 같은 반이 된 사내들 중에는 로스키(러시아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로스키와 함께 군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학교별 대항전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학교 사로청 지도원(학생들의 사상을 지도하는 교사)이 참가자들 중에서 로스키와 나를 지목해 앞에 세우고 그는 남학생 반장, 나는 여학생 반장을 하라고 지시했다. 반장의 역할은 학교대항전에 출전할 남녀 선수를 선발하고 응원을 주도했다. 우리 둘은 ‘동무’도 아닌, ‘습니다’도 아닌 어정쩡한 대화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일주일간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대회가 끝나고 우리 사이는 더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그 일이 지나고 며칠 후, 전교 가을 소풍을 다녀온 날이었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슬그머니 건네던 로스키가 다시 자연 실습장으로 나를 불러냈다. 그곳에는 다양한 식물 종들이 자라고 키 큰 은행나무와 침엽수도 여러 그루 있어 숲이 제법 울창한 곳이었다. 그 은밀한 곳에서 그가 무슨 말을 했고 나는 몇 마디 듣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그날 로스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왜 도망치듯 뛰쳐나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곧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풍선이 빵~하고 터진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경험했다. 머리가 멍했다. 그날 저녁은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 일 이후부터 로스키는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녔다. 친구들과 장난치다 뒤통수가 따가워 돌아보면 눈이 마주치고 우리 집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그를 자주 목격했다.



가을 농촌동원 때였다.(중학교 3학년이 되면 전국의 학생들은 봄(50일)과 가을(15일) 농번기에 농장에 나가 농사일을 도왔다) 우리 반이 벼 베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 앞에 10줄씩 도급이 주어지고 맡은 일을 끝내면 마지막 사람이 끝날 때까지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손이 빠르지 못한 나는 맨 꼴찌에서 벼를 베었다. 이때 1등으로 앞서간 로스키가 쉬지도 않고 내가 맡은 줄 반대편을 찾아 마중 베기를 시작했다. 지켜보던 반 친구들이 저마다 ‘어~얼레리~’하며 손가락질하며 우리를 놀려먹었다. 

나는 불미스러운 소문에 내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근원으로 나에게 과도하게 친절한 로스키가 너무너무 싫었다. 

하지만 불행의 그늘은 계속 나만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놀림당하는 것이 싫어 억지로 힘을 쓰다가 낫에 손가락이 베이고 피가 쏟아지면 로스키가 달려왔고 그는 입고 있는 바지 안감을 찢어 내 손가락을 묶어 지열을 시켰다. 내가 묵는 숙소에 비가 샌다는 걸 알고는 가을비를 맞으며 새는 지붕을 고쳐주었고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는 슈퍼맨처럼 나타나 나를 구했다. 그럴수록 학교에는 발 없는 소문이 돌아다녔다.

‘6학년 2반 로스키랑 걔 좋아한대...’

내 이름이 전교생의 가십거리가 되고 이 사태를 만든 로스키가 미웠다. 나는 고민 끝에 담임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했다. 담임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날 담임은 로스키를 불러 나를 쫓아다니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하지만 졸업하는 날까지 그의 과한 관심과 눈길은 계속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 아이는 군인이 되어 먼 곳으로 떠나가고 나는 사회인이 되었다.

운명의 신이 장난을 쳤을까, 로스키가 군대 간 순간부터 이유모를 허전함과 그리움이 시작되었다. 풋사랑이었다. 길을 가다 군인을 보면 그 아이가 떠오르고 지난 1년 동안 왜 그리도 모질게 외면하고 밀어냈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뒤늦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군사복무 10년 동안은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애끓는 마음을 일기장에 꾹꾹 눌러 담을 뿐 편지를 써도 보낼 곳이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로스키를 짝사랑했다.


지금은 나는 남한 사람, 그는 북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 아이의 이성을 향한 첫 마음과 나의 소중했던 풋사랑은 불행하게도 한 계절, 같은 시간에 피지 못하고 어긋나 버렸다. 나는 성장이 늦고 성격이 무딘 나를 오랫동안 자책했다.

가을이 오면 들국화 한 송이 꺾어 수줍게 건네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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