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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고난의 행군'과 탈북

몇 년 전 겨울, 꽁꽁 얼어붙은 한강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얼음 속에 갖힌 자전거를 보는 순간 고난의행군 시기  압록강에서 죽어간 수많은 탈북자의 죽음이 떠올라 마음이 시렸다.


1994년 즈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고난의 행군’은 1938년 말∼1939년 초 김일성이 만주 벌판에서 추위와 가난을 견디며 일본군 토벌대와 싸우던 100일간의 행군에서 유래되었다.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90년대 중반 북한은 ‘고난의 행군’ 구호를 내걸고 수령(김일성)이 고난의 행군시기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이룬 것처럼 우리도 현재의 경제난을 이겨내자고 선동했다.
1986년 큰 물난리가 나고 배급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흉년이 계속되었다. 벼이삭이 영글기 전에 서리가 내려 한 해 농사를 망치고 밭작물의 으뜸인 강냉이는 긴 가뭄에 애기 주먹만 한 이삭을 겨우 건졌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민들의 식의주를 책임지던 배급소가 문을 닫았다. 배급의 종류는 식량, 조미료, 야채, 과일, 고기, 의복, 신발, 땔감 등 생존에 필요한 거의 전부였다. 배급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인민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곳곳에 장마당이 생기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면 무엇이든 장마당에서 거래되었다. 국가는 장마당을 통해 개인의 경제력이 생기고 힘이 길러지는 것이 두려워 진압했다. 하지만 생존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막을 길이 없자 적절하게 단속하고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의 고난의 행군은 고작 100일에서 마무리되었지만 90년대에 다시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96년 여름이 되자 동네에는 하루가 멀다 하게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뒷줄에 사는 다섯 식구가 어젯밤 쥐약 먹고 죽었대.’ ‘앞집 여섯 식구도 굶어 죽었단다.’
자식 셋을 남겨두고 장사 떠난 부모가 석 달 열흘 돌아오지 않자 아이들은 꽃제비가 되고, 오랫동안 곡식을 먹지 못한 동네 노인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당시는 시신을 모시는 관을 짤 널이 곡식보다 구하기 어려울 만큼 온 나라에 죽음이 창궐했다. 아침이 되면 어른도 아이도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인사가 살아남은 자에게 건네는 위로요, 위안이 되었다.


친할아버지도 그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할아버지는 5리 길을 걸어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엄마가 시장에서 벌어온 강냉이가루로 죽 한 사발을 대접했다. 너무 묽어서 물처럼 마시면 끝나는 죽 한 그릇이 큰아들 집에서 대접받은 마지막 음식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할아버지가 곡기를 끊으셨다. 할머니가 풀 죽이라도 마셔야 산다고 사정해도 할아버지는 입을 열지 않으셨다. 살만큼 산 입을 줄여야 젊은 입이라도 살아남는다는 어른으로서의 마지막 배려였고 사회에 대한 저항의 침묵이었다. 호랑이 같이 기개가 넘치던 할아버지가 잠을 자듯이 조용하게 세상을 떠나갔다.    
돼지를 키우고 밀주와 두부를 만들어 팔던 엄마는 장사 밑천을 남기지 못하고 빈손이 되었다. 다시 딸 혼수품을 팔아 빵장사를 시작하고 강가의 모래바닥에서 사금을 얻겠다고 고생만 하다가 쓰러졌다. 몸이 아픈 아버지가 자전거를 수리하고 바다에서 고기를 낚아와 팔면 우리 4 식구(남동생은 군에 입대했다.) 하루 멀건 죽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내 생전에 이밥 한 그릇 먹어 볼 수 있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동네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가 언젠가 우리 집에도 오겠구나. 그 날이 오늘내일일 수도 있겠구나.’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무단으로 결근하고 장사를 해보려고 결심했다. 장사 밑천은 친구에게 1,000원을 빌렸다. 이자는 3푼리였다. 당시 1,000원을 빌리면 한 달에 300원을 얹어 1,300원을 돌려주는 것이 암암리에 정해진 기준이었다. 하지만 돈을 가진 사람은 이자놀이를 꺼렸다. 돈을 빌려 장사하다가 망하거나 죽음 등의 이유로 갚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1,000원으로는 생선을 샀다. 큰 가방 가득 20kg가량의 비린 물이 흐르는 생선을 짊어지고 청진 시장에 팔았다. 1,005원, 첫 장사에서 5원을 벌었다. 하루치 노동의 값은 돌아오는 길에 빵 한 개(5원)로 허기를 달래는데 썼다. 나는 첫 장사에서 본전을 까먹지 않은 것에 마음을 쓸어내렸다.
당시 장거리 장사가 돈벌이된다는 소문이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행방’을 다녔다. 청진에서 신의주까지는 12시간이면 도착했다. 하지만 전기로 움직이는 기차가 전력이 부족해 한번 멈추면 언제 다시 출발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전력사정에 따라 일주일, 보름이 걸려 도착할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장거리 장사는 한번 떠나면 행방을 알 수 없이 묘연하다 하여 ‘행방’이라고 불렀다. 장거리 장사의 유일한 운송수단은 기차였다. 다른 방법이나 출로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나도 행방을 떠나게 되었다. 1997년 3월 초, 나와 동생은 혜산으로 흘러들었다. 사람과 물건이 뒤엉킨 기차에서 압사당하지 않고 다행히 혜산 땅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더 이상의 장사 밑천도 돌아갈 여비도 남지 않았다. 그 순간 돈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치며 집을 나서던 상황이 떠올랐다. 그날 아버지는 행방을 떠나겠다는 딸들을 못 가게 말리셨다, 나는 장사를 떠나지 않으면 우리 식구 다 굶어 죽는다고 소리쳤다. 아버지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며 설득하다 내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그 순간 아버지 눈에 고인 눈물이 보였다. 아버지도 나도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집으로 기어드는 공포를 들키지 않으려고 돌아선 채로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는 그 순간 딸들과의 마지막을 예감했고 나는 얼얼한 귓불을 만지며 아버지의 사랑을 읽었다.  
나와 동생은 오도 가도 못하고 혜산 기차역에서 꽃제비가 되었다. 3일을 기다려도 집으로 가는 기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 배가 고파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빵 3개와 바꾸고 그 후로도 사나흘은 더 굶었다. 백두산이 지척인 혜산의 날씨는 3월에도 눈이 쌓여있고 압록강도 아직 꽁꽁 얼어 있었다. 여행증이 없는 사람은 역사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역사 안에서 굶어 죽거나 객사하는 시신을 처리하기 골치 아픈 역 관리인들이 행색이 꽃제비 같거나 눈동자가 풀려 기운 없어 보이는 객은 아예 역사 출입을 막아섰다.
나와 동생도 역사 출입을 거절당하고 낮에는 시장을 헤집고 밤에는 혜산 역사 벽에 기대어 새우잠을 잤다. 어느 날 거지꼴을 한 젊은 여자가 서너 명의 꽃제비 귀를 붙잡고 수군거렸다. “어젯밤 저 강을 건너가 밥도 먹고 쌀도 한 자루 얻어왔소. 쌀은 팔았고 오늘 저녁 또 갈 거요. 쉿.”
그녀에게 다가가 우리도 데려가 달라고 매달렸다.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깊은 밤, 도둑 월경에 일행이 많으면 위험할 테니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들 일행에 끼지는 못했지만 강을 건너면 먹을 음식과 쌀을 준다면 도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주일을 굶은 인간에게 ‘국가’니 ‘불법’이니 ‘범죄’ 따위의 자각은 쌀알 한 톨보다 가치 없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동생과 나는 손을 맞잡고 압록강 얼음 위에 섰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들릴 뿐 양쪽 경비대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고요했다. 5m, 10m, 눈 뜬 장님처럼 공중에 눈을 매달고 한발 한발 얼음 위를 더듬던 발끝이 푹 고꾸라지고 추락하더니 손 쓸 새도 없이 강바닥으로 끌려들어 갔다. 얼음 밑 물살은 거세찼다. 발이 강바닥에 닿고 머리 위로 얼음덩이가 스치기도 했다. 다행히 강기슭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쉽게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깊이 잠든 동네의 개들이 굶주리고 기운 빠진 우리를 무시하듯 머어엉 멍~ 게으르게 짖었다.
“배고파서 왔습니다. 밥 좀 주시오.”
“배고파서 왔습니다. 밥 좀 주시오.”
사람 키만큼 높은 대문이 빠끔 열리더니 머리 절반이 나타나 물었다.
“누구요, 어디서 왔소?”
“조선에서 배고파서 왔습니다. 밥 좀 주시오.”
여인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우리를 위아래로 흩더니 ‘아이고, 아이고’ 한숨 쉬며 대문을 열어주었다. 주인아주머니였다. 그는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은 큰 아들을 기다리다가 인기척을 듣고 마중 나왔다고 했다. 기다리던 아들을 맞이하듯 감기 걸린다고 걱정하며 우리를 아랫목에 끌어 앉혔다. 물기가 질펀한 겉옷은 빨래 줄에 널고 속옷은 꼭 짜서 다시 입으라고 말하고는 밥을 내놓았다. 비빔밥 그릇보다 큰 양푼에 하얀 쌀밥이 절반 있었다. 솥뚜껑 안에서 반찬도 서너 가지 나왔다.  
“저녁에 먹고 남은 거라서 별로 없소. 배고플 텐데 빨리 먹소.”
하얀 쌀밥이었다. 죽기 전에 쌀밥 한번 먹어보고 싶다며 한숨짓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 생각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푼에 담긴 쌀밥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하지만 뱃속은 빈 항아리처럼 허전했다. 둘은 숟가락을 놓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아이고, 이 어린것들 배하나 못 채워주면서 나쁜 놈들...” 누구를 욕하는지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아랫목에 모셔놓은 보자기를 들췄다. 출타 중인 아들 밥이었다.
“먹어라.”
양푼 밥 버금가는 양이었다. 둘은 반찬으로 나온 그릇까지 싹싹 비우고서야 숟가락은 내려놓았다. 다음날 저녁 우리는 쌀을 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아 빈손으로 그 집을 나왔다. 다시 칠흑같이 어두운 밤, 볏짚더미를 헤치던 논두렁길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에 잡히고 말았다. 경비대 창고 안에는 우리처럼 불법 도강한 조선 사람이 60여 명 갇혀있었다. 며칠 후 중국 국경경비대가 조선인들을 넘겨주는 대가로 벌목한 통나무를 가져간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쌀밥의 맛을 알아버린 자의 의지를 막을 길이 없었다.
나는 그 후로도 두 번 더 압록강을 불법 도강한 끝에 중국 깊숙한 곳에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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